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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5 10:34

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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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jpg

 

 

 새벽녘에 잠이 깨었다. 무서운 꿈을 꾼 것도 아닌데 갑자기 단잠이 달아나 버렸다. 추적거리며 내리는 겨울비가 금방 잠이 깬 내 의식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불현듯 고향 사랑방 아궁이가 화면처럼 다가왔다. 어린 시절, 나는 방학만 하면 고향으로 향했다. 경기도 포천군 화현이 나의 친척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고향이다. 나지막한 선산이 버티고 있고 산자락을 벗삼아 그림처럼 이집안과 유집안이 사이좋게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방학만 하면 시골로 향한 이유는 큰아버지, 어머니(백부모)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분들의 사랑이 위축될 수 밖에 없는 내 성격을 밝게 가꾸어 주었고 그 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행복한 기운이 나를 감싼다.

 

 큰아버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흔하지 않은 콧수염을 기르신 커다란 키에 멋쟁이셨다. 콧수염이 얼마나 잘 어울렸는지 마치 독립군 대장을 보는듯했다. 약간은 허스키하면서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그래서인지 온 동네에서 큰 어른으로 대접을 받음과 동시에 사람들과 친척들은 큰아버지를 무서워했다. 하지만 난 큰아버지가 너무도 좋았다. 젊어서부터 한량 기질이 있어서 많은 곳을 떠돌아다니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큰아버지는 할 이야기가 많으셨다. 워낙 질문이 많은 내게 한 번도 싫은 기색 없이 간간히 기침 섞인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상하게 대답 해 주셨다. 다 받아주시는 큰아버지의 사랑이 장애를 가진 조카를 당당하게 만들어 준 것 같다.

 

 큰 엄마는 생긴 모양이 호랑이 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자상하셨다. 아이들이 모여 놀다 보면 싸우기도 하고 난리법석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큰엄마가 커다란 빗자루를 들고 등장한다. 마치 마징가 Z처럼! 큰엄마는 한번도 나에게 손을 대신 적이 없었다. 무조건 다른 아이들부터 때렸다. 누군가 재철이가 먼저 그랬다고 소리쳐도 큰엄마는 우리 재철이가 그럴 리 없다며 다른 아이들만 야단을 치고 매를 때렸다. 그 큰엄마의 모습이 얼마나 든든하고 멋이 있었는지 모른다.

 

 큰아버지는 대목(大木: 뛰어난 재주를 가진 목수)이셨다. 큰댁뿐만 아니라 온 동네에 집들은 큰아버지가 다 지으셨다고 한다. 그만큼 손재주가 뛰어난 분이셨다. 큰댁에 가면 큰아버지와 난 사랑방에서 함께 잤다. 초저녁에 불을 때면 방은 펄펄 끓는다. 동네 어른들의 마실이 끝나 돌아가고 나면 아랫목에 이불이 펴지고 큰아버지와 난 가지런히 누웠다. 한밤중, 큰아버지의 기침이 시작된다. 지금 생각 해 보면 노인성 천식이 있으셨던 것 같다. 하루 종일 뛰어노느라 피곤했던 나는 기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에 곯아 떨어졌다. 새벽 먼동이 트기 직전, 소변이 마려워 일어나보면 큰아버지는 이미 자리에 안 계셨다.

 

 군불을 지피기 위해서였다. 소에게 먹일 여물도 쑤고, 10여 시간이 지나면서 식어버린 온돌을 따뜻이 데피기 위해 큰아버지는 새벽이면 일어나 군불을 지피셨다. 잠결에 일어나 뒷간에 다녀오며 아궁이 앞에 앉아계신 큰아버지의 얼굴에 어른거리던 불볕의 잔상이 아직도 남아있다. “아침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더 자렴그 다정한 목소리가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노인이 되면 초저녁 잠이 많아지고 새벽 잠이 없어진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큰아버지는 새벽이면 일어나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셨다. 큰아버지는 새벽마다 군불을 지피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싸늘하게 식어가는 온돌 때문에 행여 조카가 잠을 설치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게 불을 지피고 타오르는 불빛을 보며 그분은 인생의 깊은 곳을 음미하셨으리라.

 

 불은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조금씩 번져가다가 활활타올라 거세게 불길을 내뿜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이면 불을 피운다. 교회 하기수련회 마지막 밤에 가지는 순서가 Camp Fire이다. 불을 보며 사람들은 생을 돌아보고, 불을 보며 삶의 결단을 한다. 생을 돌아보고 하루를 계획하며 군불을 지피시던 큰아버지는 실로 대인(大人)이었다. 단잠에서 깨어난 내 가슴에 이미 고인이 되신 큰아버지와 군불의 잔영이 진하게 번져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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