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2022.06.17 20:15

오디

조회 수 825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오디.jpg

 

 

  날마다 출근하는 아내가 오늘따라 귀가 시간이 늦어지고 있다.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조금 더 기다리다보니 현관문이 열리고 아내가 무언가 잔뜩 담긴 용기를 내어민다. “이거 드셔!” “뭔데?” 들여다보니 오디였다. “와우, 어느새 오디가?” 한 움큼 입에 넣으니 특유의 향이 번지며 달콤하게 적셔온다. 그렇게 아내는 철을 따라 생각지도 못했던 과실을 제공한다. 어디에서 뽕나무를 발견하고 이 더운날 오디를 따온 것인지? 신기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가을이면 밤을 따오고, 은행을 주워 구운 은행알을 입에 넣어준다. 한국에서부터 있던일이라 낯설지는 않지만 미국에 와서도 이런 호강을 누리게 해주는 아내가 고마울 뿐이다.

 

  그래, 6월에는 오디가 열린다. 아내는 그것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뽕나무가 많았다. 길가에, 그리고 넓은 논둑에 뽕나무가 있었다. 삭개오가 올라갔던 만큼은 아니지만 때로는 큼지막한 나무도 있었다. 나무에 걸터앉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디를 따 먹었다. 이제 막 모판에서 옮겨 모종한 어린 벼싹들의 약동을 감상하며 말이다. 오디를 따먹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만한 나무는 올라타야 했는데 뽕나무는 미끄러운 편이라 상처를 감수하고 올라야 했다. 게다가 거미줄이 많았고 온갖 벌레들이 들러붙어 있어 발라내어 따먹는 일은 고된 노동이었다. 하지만 별로 먹을 것이 없던 그 시절에는 번거로움을 친구삼아 오디를 따먹으며 다녔다.

 

  어디에 담아 먹을 겨를도 없이 손으로 딴 오디는 입으로 직행을 했다. 그러다보니 손과 입술, 얼굴까지 보라색으로 물들 수밖에. 자신의 모습은 알아차리지도 못한채 친구의 얼굴에 검게 번져가는 즙을 보며 우스워 깔깔거리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당시에 뽕나무가 많았던 것은 집집마다 부업으로 누에를 쳤던 까닭이었다. 석원이네는 누에가 많았다. 석원 어머니는 이른 봄이 되면 까만 누에씨를 작은 상자에서 부화시켰다. 까만색에서 하루하루 색을 달리하는 누에씨를 정성스럽게 보살폈다. 보석이라도 보듬듯 아침저녁으로 누에씨의 색깔을 살폈다. 어느 날 상자 안에는 꼬물꼬물 개미 같은 누에가 움직였다.

 

  누에 방에는 싸리나무 침대 위에 층층이 누에들이 자라난다. 이때쯤 뽕나무도 어린잎을 내밀어 누에 키울 준비를 한다. 어린 뽕잎을 곱게 채 썰어 어린누에에 뿌려준다. 첫잠을 자고 난 누에가 허물을 벗고 1령이 되고, 4주일 동안에 잠을 네 번 자는데 그때마다 먹는 뽕잎의 양은 대단하다. 잔뜩 오므려서 삐죽 나온 것 같은 입이 오물오물 움직이면 어느새 뽕잎은 간 곳 없이 사라져버렸다. 누에 방에 들어가보면 사각사각소리가 모여 제법 요란하게 들렸다.

 

  한번은 넉잠을 잔 누에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친구의 꾀임(?)에 넘어가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하고 삼키기로 하였다. 내가 지는 바람에 먼저 엄청나게 커버려 징그러운 누에, 꿈틀거리는 누에를 산채로 삼키는 해프닝도 가져야 했다. 며칠을 꺼림직한 기분으로 살아야 했지만 그때부터 머리가 좋아졌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고단백 그대로였다. 친구와 가끔 누에 방에 들어가 숨을 죽이고 누에가 뽕잎 갉아먹는 소리를 들었던 추억이 새롭다. 시원한 빗소리와도 같았고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해준 소리이기도 했다.

 

 햇볕이 뜨겁게 익어가는 초여름이면 뽕잎은 제법 억세어지고 가지에는 오디가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초록색 애벌레처럼 작고 보잘것없다가 햇볕을 받아 농익은 오디는 검보랏빛으로 변해 제법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뽕나무를 훑으며 오디를 따먹다 보면 입술은 보라색 잉크를 칠한 것처럼 물들어간다. 혓바닥에는 오디의 오돌토돌한 성근감이 남아있고 입안에는 들큼한 맛이 가득했다. 이내 성장한 누에는 고치를 짓고 그 안에 들어앉는데 번데기를 보느라 고치를 잘라 동서남북을 외치던 추억이 생생하다. 그때는 아무 생각없이 오디를 따먹으며 다녔는데 오디가 당뇨에 좋다고하니 영양식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아내가 내어민 오디를 보며 아스라이 잡힐듯한 추억을 더듬어 본다.  

 


  1. 은총의 샘가에서 현(絃)을 켜다

    “엄마… 같이 죽자!” 어린 신종호는 면회 온 어머니에게 매달렸다. 엄마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눈이 빨개졌다. 장애가 있어 외할머니 등에 업혀 학교를 다녔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생업에 매달려 바쁜 가족들에게 더 이상 짐이 될 수 없...
    Views8387
    Read More
  2. 오디

    날마다 출근하는 아내가 오늘따라 귀가 시간이 늦어지고 있다.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조금 더 기다리다보니 현관문이 열리고 아내가 무언가 잔뜩 담긴 용기를 내어민다. “이거 드셔!” “뭔데?” 들여다보니 ‘오디’였다. &...
    Views8254
    Read More
  3. 결혼의 신기루

    연거푸 토요일마다 지인의 자녀 결혼식에 참석하느라 분주하게 보내고 있다. 바야흐로 결혼 시즌이다. 코발트색 가을하늘. 멋진 턱시도와 눈부신 웨딩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신랑 신부의 모습은 진정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영롱하다. 필라에는 정말 멋진 야외 ...
    Views8146
    Read More
  4. 거울 보고 가위 · 바위 · 보

    거울을 보고 가위, 바위, 보를 해보라! 수백 번을 해도 승부가 나질 않는다. 계속 비길 수밖에. 그런데 평생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부류가 있다. 바로 부부이다. 갈등없이 살아가는 부부가 있다. 모든 것이 너무 잘 맞아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부부말이다. ...
    Views8106
    Read More
  5. 아이스케키

    한 여름 뙤약볕이 따갑다. 목이 말라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 마시다가 문득 어린 시절에 추억이 떠올랐다. 나는 초등학교 때 시골에서 살았다. 날씨가 더워지면 냇가로 멱(수영)을 감으러 가서 더위를 식혔다. 배가 고프면 주로 감자나 옥수수를 먹었다...
    Views8056
    Read More
  6. 누가 ‘욕’을 아름답다 하는가?

    사람은 만나면 말을 한다. 조용히, 어떨 때는 큰 소리로, 부드럽게 말을 할 때도 있지만 거칠고 성난 파도가 치듯 말을 하기도 한다. 말 중에 해독이 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욕’이다. 세상을 살면서 욕 한마디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나는 비기...
    Views7989
    Read More
  7. 영옥 & 영희

    장애아를 둔 학부모들은 일평생 무거운 돌에 짓눌려 있는 듯한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옆집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자라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기대임을 실감하면서 말이다. 소중한 내 아이에 대한 사랑은 그 누구보다 진하다. 남들 눈에는 어떻게 ...
    Views7974
    Read More
  8. 웃는 모습이 아름다워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인생에게 주어진 은총이다. 태어나 요람에 누우면 부모의 숨결, 들려주는 목소리가 아이를 만난다. “엄마해 봐, 아빠 해봐” 수만번을 어우르며 외치다 보면 드디어 아이의 입이 열린다. 말을 시작하며 아이는 소통을 시작한...
    Views7965
    Read More
  9.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의 그늘

    사람은 생각할수록 신비로운 존재이다. 우선 다양성이다. 미국에 살기에 실감하지만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를 뿐 아니라 문화가 다르다. 따라서 대화를 해보면 제스추어도 다양하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정적이다. 대부분 목소리 톤이 낮다. 끄덕이며, 반...
    Views7952
    Read More
  10. 해방일지 & 우리들의 블루스

    한 교회에서 35년을 목회하고 은퇴하신 목사님이 “이 목사님, 드라마 안에 인생사가 담겨있는 줄 이제야 알겠어요”라고 말해 놀랐다. 일선에서 목회할 때에는 드라마를 볼 겨를도 없었단다. 게다가 그런 것은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보는 것 정도로...
    Views7939
    Read More
  11. “밀알의 밤”을 열며

    가을이다. 아직 한낮에는 햇볕이 따갑지만 습도가 낮아 가을바람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가을은 상념의 계절이다. 여름 열기에 세월 가는 것을 잊고 살다가 스산한 가을바람이 옷깃을 스치면 비로소 삶의 벤치에 걸터앉아 지난날을 돌아보게 된다. 이제 곧 ...
    Views7936
    Read More
  12. 기다려 주는 사랑

    누구나 눈을 뜨면 외출을 한다. 사업이나 직장으로, 혹은 사적인 일을 감당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누군가 출입문을 나설때면 배웅을 해준다. 덕담을 곁들여서 말이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께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깍듯이 인사를 하고 등교를...
    Views7901
    Read More
  13. 바람길

    무덥던 여름 기운이 기세가 꺾이며 차츰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친다. 그렇게 한 계절이 바람을 타고 바뀌어 가고 있다. 무척이나 차가웠던 겨울바람, 그리고 가슴을 달뜨게 하던 봄바람의 기억이 저만치 멀어져 갈 무렵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게 만드...
    Views7892
    Read More
  14. 지금합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막상 사정이 생기거나 여유가 있다고 생각되면 지금 할 일을 나중으로 미루게 된다. 그것이 흔한 일상이지만 사소한 게으름이 인생의 기회를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경험을 ...
    Views7876
    Read More
  15. 사랑, 그 아름답고 소중한 얘기들

    우리시대 최고의 락밴드 <송골매>가 “전국 공연을 나선다”는 소식을 들으며 저만치 잊혀졌던 추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송골매가 결성된 것이 1979년이니까 40여년 만에 노장(?)들이 무대에 함께 서는 것이다. 공연 테마가 “열정”이...
    Views7867
    Read More
  16. 다섯손가락

    얼마 전 피아니스트 임윤찬군의 쾌거 소식을 접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나이로 우승하며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그 연주자다. 18살 밖에 안된 소년이 세계적인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나...
    Views7843
    Read More
  17. 인생을 살아보니

    젊을때는 긴장감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스쳐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달려 나가는 청춘은 힘겹고 모든 것이 낯설다. 넘어지고 깨어지고 실수하지만 멈출 수도 없다. 학업, 이후의 취업. 그리고 인륜지대사 결혼. 이후에는 더 높은곳을 향...
    Views7842
    Read More
  18. 받으면 입장이 달라진다

    사람이 이 땅에 산다는 것은 “관계”를 의미한다. 숙명적인 “가족 관계”로부터 자라나며 “친구 관계” “연인 관계” 장성하여 가정을 꾸미면 “부부관계”가 형성된다. “인생은 곧 관계”...
    Views7836
    Read More
  19. 나는 괜찮은 사람인가?

    사람들마다 자아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 느끼는 방향과 다른 사람을 통해 받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한국에 나가 대학 동창을 만났다. 개척하여 성장한 중형교회를 건실하게 목회해 왔는데 무리를 했는지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작년 말....
    Views7758
    Read More
  20. 존재 자체로도 귀한 분들

    이 세상에서 제일 못난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일 것이다. 부모는 자식의 뿌리이다. 부모 없이 내가 존재할 수 없다. 묻고 싶다. “과연 나는 나의 부모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학력, 인격, 경제력, 기타 어떤 조건을 ...
    Views7687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Next
/ 36

주소: 423 Derstine Ave. Lansdale., PA 19446
Tel: (215) 913-3008
e-mail: philamilal@hotmail.com

© k2s0o1d4e0s2i1g5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