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약속의 줄기를 타고 이어져 오고 있다. 약속은 다양하며 그 범위는 한없이 넓다. 개인끼리의 약속이 있다. 크게는 국가 간의 약속이 있다.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좋다. 그래서 잘 지키려고 노력한다. 나에게는 약속에 대한 독특한 철학이 있다. 첫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신뢰하지 않는다. 처음 약속은 ‘첫인상’처럼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오랜 지기인 목사 친구는 시간개념이 희박하다. 둘이 만날 때는 물론이고 친구들과 모임을 가질 때에도 제일 늦게 나타난다.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나타나기에 친구들도 그의 태도에 면역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평탄하던 그의 목회에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다. 곁에서 지켜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고통을 당해서 우리 모두는 그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 모른다. 목회가 끝날 것 같은 위기를 간신히 넘으며 그가 변했다.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얼마나 친구들을 잘 챙기는지 변한 친구의 모습에 모두는 감탄을 했다.
1997년 12월, 한국은 『 IMF』라는 ‘경제적 돌풍’을 맞이하게 된다. 80년대 후반부터 비약적인 도약을 계속하던 한국경제가 상상하지 못할 어려움을 경험한다. 경제적 어려움이 충격적으로 닥쳐오면서 파탄에 이르는 가정이 속출하였다. 가장이 경제력이 없어지자 깨어지는 가정은 늘어만 갔다. 자연히 아이들은 고아원에 버려졌다.
“아빠가 금방 데리러 올게” 하지만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이 가도 아빠는 소식이 없다. 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며 겪은 고아원 생활은 그들에게는 지옥이었다. 얼마나 서러웠을까? 얼마나 외로워하며 밤을 지샜을까? 무심히 세월은 지나고 그들이 이제 3, 40대에 접어들었다. 그 상처를 안고 사회 요소요소에서 살아가고 있다. 잊혀질 만 하면 터지는 사회문제는 그렇게 뿌리가 깊다.
약속은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그 약속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결혼식을 생각한다. 서약하는 시간이 있다. 주례자가 묻는 질문에 분명히 신랑, 신부는 분명히 “예”라고 대답을 한다. 하객들은 물론 하나님 앞에서 말이다. 하지만 결혼생활을 하다가 조금만 마음이 안 맞으면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다. 너무도 쉽게 갈라서 버린다. 이제 이혼은 그렇게 별스런 일이 아니다.
약속은 힘 있는 사람이 더 잘 지켜야 한다. 그런데 힘 있는 사람들은 ‘힘’을 이용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바꾸어 버린다. 힘이 없고 나약한 사람들만 발을 동동 구르며 고통을 당한다. 지도자의 덕목 중에 하나는 “약속”이다. 지도자가 약속을 생명처럼 여길 때에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며 따른다. 나라, 교회, 지역사회, 공동체가 건강해 진다. 약속이 곧 인격이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큰 약속, 작은 약속이 있을 수 있을까? 모든 약속은 중요하다. 아이에게 한 약속은 꼭 지켜야만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아이는 누구나 신뢰하며 타인과의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인격을 연마해 간다. 약속을 꼭 지키지 못할 부득이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는 가정, 사회는 건강하게 가꾸어져 간다.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는 “아무리 보잘 것 없은 것이라 하더라도 한번 약속한 일은 상대방이 감탄할 정도로 지켜야 한다. 신용과 체면도 중요하지만 약속을 어기면 서로의 믿음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약속은 꼭 지켜야만 한다”라고 했다.
새해가 밝은지 어느새 한달이 다 되어 간다. 새해와 가장 어울리는 말은 약속이다. 새롭다는 것은 약속이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는 이유는 절대자의 약속 때문이다. 사람은 참 잘도 변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히브리서 13:8)이시다.
신앙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했던 약속을 번복해도, 그분은 여전히 거기에 머무르신다. 기다려 주고 이해 해 주며 “괜찮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약속을 생명처럼 여기는 크리스천들이 늘어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믿어줄 수 있는 교회, 누구나 기대고 싶은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