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전, 한국에 갔을 때 일이다. 지인이 별식을 대접한다며 차에 나를 태웠다. ‘도대체 무슨 음식을 사주려나?’ 호기심과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서울을 벗어나 가평쪽으로 달리던 차는 큰길을 벗어나 논길로 접어들었다. 허름해 보이는 집, 간판도 없는 안쪽으로 들어서니 어디서 모였는지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있었다. 오리고기 전문점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려다 깜짝 놀랐다. 신사임당이 그려진 5만원짜리 지폐가 방석에 인쇄되어 있었다. 소위 <돈방석>이었다.
“와, 우리 다 돈방석에 앉았네” 일행이 파안대소하며 함께 외쳤다. 희한하게도 기분은 좋았다. 그러면서 나도 속물임을 깨달았다. 돈, 참 희한한 존재이다. 대놓고 돈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면 천박해 보이는 듯하다. 돈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의아해하면서도 존경한다. 하지만 돈은 현실이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도 드러내놓고 돈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는 사람은 드물다.
재력이 주는 뉘앙스는 다양하다. 말끔한 차림에 반듯한 사람을 보면 일단 있어 보인다. 그런데 알고보니 가진 돈이 별로란다. 갑자기 차려입은 허우대가 허세처럼 보인다. 옷도 그리 값나가 보이지 않고 행색도 그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사람이 돈이 많다고 언질을 준다. 갑자기 그 사람이 달리 보인다. 옷 자체도 겸손의 표식처럼 보인다. 돈의 힘이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해 보면 돈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한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가게 된다. 이미 신앙을 가진 사람은 당연한 절차이지만 전혀 기독교를 접촉해 보지 않은 사람도 교회의 문턱을 넘어서지 않을 수가 없다. 일단 한국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곳, 여러 가지 정보를 들을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을 만나기 가장 쉬운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주 부담스러운 것이 있다. 바로 헌금이다. 그냥 지나치며 신앙생활을 하려 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직분이 주어진다. 직분에 걸맞는 헌금이 걸림돌이 되기 시작한다. 결국 점점 마음을 짓눌러오고 다른 핑계를 대면서 교회 출석이 드물어진다. 들어가보면 헌금문제이다. 인간관계,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은 돈이 빌미가 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선물을 누구나 좋아한다. 선물이란 말 자체가 일단 기분을 좋게 만든다. 그런데 선물보다 돈(Cash)을 더 선호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회자되는 말 “뭐니 뭐니해도 머니(Money)가 제일이다”. 상품권이나 커피 쿠폰보다 현찰이 확실히 더 좋다. 쓰기가 더 용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나라와 인종을 초월하여 누구나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본능이다.
선풍적인 인기를 구사한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그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해 준다. 우리의 삶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돈이다. 돈이 생각처럼 쉽게 벌어지지 않는다. 원화보다 달러는 더 그런 느낌이다. “지금보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누구나 한다. <돈방석> 몽상을 꾸면서 말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행복이란 소유를 욕구로 나눈 값”이라는 공식을 발표했다. 행복=소유÷욕구. 결국 욕구를 줄이면 금방 행복해 진다는 의미지만 그것을 수긍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최대 재벌 록펠러에게 기자가 물었다. “얼마나 벌어야 만족하시겠습니까?” 그의 대답 “The More” 그래서 인간이다.
아낀다고 모아지는 것도 아니다. 베푼다고 쪼달리는 것도 아니다. 돈은 보이지 않은 능력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다.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디에 쓰느냐는 더 소중하다. 주어진 돈으로 이웃을 즐겁게 하며, 내 마음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 진짜 부자가 아닐까? “나이를 먹으면 입은 다물고 지갑을 열어라” 이 말이 폐부까지 파고든다. 돈이 곧 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