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손자의 산일이 가까워지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이의 이름을 짓는 일이었다. 오래전 이미 내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준 경험이 있어 수월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태어날 아이의 부모의 결정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장시간 토론을 벌였지만 다 맘에 들어하지 않아 몇 차례나 포기하고 돌아섰다. 결국 출산 직전 이름을 지어왔는데 아주 심플하면서도 의미가 있어 좋았다.
과연 나의 부모님도 이렇게 고심을 하며 내 이름을 지었을까? 이름의 의미는 비중이 크다. 우리 세대에는 거의 돌림이 있어서 한 글자만 덧붙이는 형태였다면 신세대들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튀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아니, 어떻게 저런 이름을 지었을까?’ 놀라움과 의문이 교차하는 특이한 이름이 눈길을 끈다.
“으뜸” “공주” “빛나” “우주”부터 기독교 집안에서는 성경 인물을 따라 작명하는 경우가 많다. 2024년 기준으로 남자 아기 이름 순위는 1위 ‘이준. 도윤, 하준, 은우’ 여자 아기는 ‘서아, 이서, 아윤, 하윤’의 흐름이다. 일반 부모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철학관에 의뢰하여 출생 시간 등 여러 가지 뜻을 맞추어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다.
이름은 우선 부르기가 좋아야 한다. 이름은 좋은데 성을 붙이면 호칭이 곤란해 지는 경우가 생긴다. 여아를 “리라”라고 지었다고 하자. 청순하고 날씬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주는 국제화 이름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성씨가 “오”씨는 “오리라” 그런대로 괜찮은 듯 하지만 “고”씨라고 하면 더 난감해 진다. .
아들 이름을 “득기”라고 지었다고 하자. 대체로 부르기는 무난한데 최 씨이면 “최득기”. 안 씨이면 “안득기”가 된다. 실제로 ‘안득기’란 학생이 아버지 직장을 따라서 지방에서 서울로 전학을 왔다. 선생님이 “너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다. “예, 안득기입니다.” 몇 차례 물어도 한결같이 안득기라고 하니까 선생님이 역정을 내며 “불량스럽다”고 야단을 쳤다. 언뜻 들으면 “안듣기”가 된 때문이다.
둘째는 놀림감이 될 위험이 있는 이름은 피해야 한다. 옛날 부모들은 자식 명(命)이 길어 오래 살라는 뜻에서 깊은 생각없이 이름을 지었다. 아들선호사상이 팽배하던 시대에는 아들을 기원하며 딸의 이름을 남성냄새가 나도록 짓는 때도 있었다. 셋째는 보편적이면서 순수한 이름이 좋다. 흔한 이름은 피하는 것도 좋다고 본다. “영구”는 사실 뜻이 좋은 이름이다. 하지만 한 코메디언 심형래가 “영구없다!”를 외치며 선세이션이 일으키자 “영구 수난시대”를 겪어야 했다. 공교롭게도 내 매제 이름이 “영구”이다.
미국에 살며 시민권을 취득하려면 일단 이름을 정해야 한다. 한국 이름을 그대로 등재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분은 아예 영어로 개명하기도 하고, 자신의 이름에 영어를 살짝 가미하기도 한다. 특히 여성인 경우 남편 성(性)을 따라가고, 영문을 붙여버리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모 교회 성도들이나 담임 목사와 대화를 하다가 내가 아는 권사의 영어 이름을 대니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난감했다.
사실 모태에서 출생할 때는 백지상태이다. 이윽고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그 아이는 그 이름으로 평생을 살게 된다. 이름 참 희한하다. 이름이 그 사람의 이미지와 매치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인지? 이름이 그래서인지? 모를 일이다. 이름의 뉘앙스가 중요하다. 성경이름을 보면 그가 악인인지? 선한 믿음의 사람인지 느껴져 온다. “가인” “아간” “나발” “골리앗” 느낌이 쎄하다. “노아”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 “사무엘” 풍기는 이미지가 왠지 선하고 사랑스럽다.
시인 김춘수의 “꽃”을 읇어 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이 붙여지는 그 순간부터 비로소 그는 꽃이 된다. 이름대로 된다는 것은 그만큼 말의 위력은 절대적이라는 의미이다. 아무튼 이름값은 하고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