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조회 수 214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누구나 만나면 습관처럼 주고받는 인사가 있다. “세월 참 빠르다.”이다. 마치 봄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듯 하루하루가 고요히 그러나 빠르게 우리 곁을 지나간다. 비슷한 연배의 사람을 만날 때는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새 장성해 버린 아이들. 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손주들을 볼 때면 세월의 속도에 새삼 놀라게 된다.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을 줄 알았는데 짝을 만나 가정을 꾸미고, 이제는 손자로부터 “엄마”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하다. 그 모습이 흐뭇하면서도 어쩐지 가슴 한편에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아마 나보다 앞서간 이들도 이런 과정을 겪으며 인생의 황혼을 맞이했을 것이다.

 

 몇 해 전부터 내 삶에 일어난 현상은 석양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이른 저녁을 먹고 카페 창가에 앉아 담소를 나누다 문득 서쪽 하늘을 수놓는 황혼을 보면 설명하기 힘든 아련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조용히 피어난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이 하루의 피곤을 어루만지고 내 마음까지 물들이는 순간이 그때이다.

 

<2025 칼럼집 수록>

 누군가 “목사님은 여전히 그대로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오면 겉으로는 “그럴 리가요?” 하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그 말 속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음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밀알선교단 내 방에는 처음 부임해 찍은 단장 취임식 사진이 벽에 걸려 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걸어둔 것이지만 이제는 어쩐지 낯설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리라. 늙어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이 피할수 없는 고귀한 과정이다.

 

 기억이 가물거릴 만큼 오래 전, 절친 ‘밥퍼’ 최일도 목사가 뉴저지 제일장로교회 부흥회 강사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적이 있다. 예배 시간에 특별찬양까지 했다. 예배를 마치고 한 자매가 눈시울을 붉히며 다가왔다. “목사님, 저 모르시겠어요? 저 혜란이에요.” 처음에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누구라고요?” 하고 되물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천호동 동부교회에서 중·고등부 전도사로 사역하던 시절 피아노 반주를 맡았던 그 소녀였다.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그것도 미국 땅에서 마주했으니 쉽게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청초하던 외모는 이제 중년의 빛을 품은 ‘엄마’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알고보니 그녀는 그 교회의 부목사 사모로서 두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그 만남은 짧게 스쳐 갔지만 오랫동안 내 마음에 잔잔한 울림으로 남아있다.

 

 나이가 들면 가장 먼저 변하는 건 머리칼 같다. 젊은 날엔 풍성해 주체하지 못하던 머리숱이 이제는 고개를 아무리 흔들어도 미동조차 없다. 피부는 예고 없이 서서히 내려앉고, 눈은 점점 건조해져 불안감을 준다. 옛 어른들은 “인생은 60부터”라 했다. 한때는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가 유행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노년에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욕심’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노욕(老慾)’이 무섭다고 하는 것일까? 故 한경직 목사님은 말년에 누군가와 대화하다 남의 이야기가 나오면 살짝 몸을 돌리셨다고 한다. 좋은 말만 듣고, 좋은 것만 보려 애썼다는 의미이다. 노년의 삶을 우아하게 만드는 묘약은 ‘사랑, 여유, 용서, 아량, 부드러움’이다.

 

 비록 기력은 예전 같지 않아도, 덕(德)은 노년에 절정에 이른다. 덕은 스스로에게 엄격해지는 데서 시작된다. 삶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남은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 오늘도 시계의 초침은 쉼 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시간은 우리에게 잔혹하고도 공평하다. 기력이 쇠할수록 마음은 더 넓고 깊어져야 한다.

 

 봄. 여름. 가을과 함께 변해가는 들녘의 흐름에는 다 비워내고 침묵으로 가는 들판의 고요함이 있다. 삶의 흐름 속에 경험해 온 시간만큼 평온 할 줄 아는 지혜가 충만한 노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세월이 남긴 잔향을 맡아본다. 어차피 인생은 미완성이 아닐까!


  1. No Image

    그러니까

    말중에 흔히 쓰면서도 의미가 다양한 말이 있다. 그 중에 “그러니까”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니까’는 글을 쓸때에 앞 문장에서 말한 내용의 핵심을 요약하고, 정리할 때에 사용한다. “오늘은 너무 피곤했어. 그러니...
    Views16
    Read More
  2. No Image

    고집은 불편한 거울

    사람마다 어느 정도 고집은 다 가지고 있다. 예로부터 고집하면 안, 강, 최라고 하였다. 이런 성씨를 가진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실제 겪어보니 실감이 난다. ‘최’는 우리 어머니가 경주 최씨라 뼈저리게 체험을 했다. 오죽하면 총각 시절 마음...
    Views650
    Read More
  3. No Image

    북 콘서트를 열며

    “목사님, 이렇게 오래 글을 쓰셨는데. 책 한권 내세요” 만나는 사람마다 무심코 내뱉던 말이다. 그러고 보니 <주간필라>에 글을 실은 세월이 20년이 넘었다. 언뜻 헤아려 보아도 수필 천편이 넘는다. 하지만 정작 나는 굳이 책을 내야 하는 것에 ...
    Views959
    Read More
  4. No Image

    가을은 다시 창밖에

    필라의 여름은 한국처럼 끈적거리거나 따갑지 않아서 좋다. 가는 곳마다 울창한 숲이 우거져있고 간간히 숲을 적시는 빗줄기가 있기에 그렇다. 한낮에는 기온이 치솟다가도 밤중에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처음 미국 L.A.로 이민을 왔...
    Views1081
    Read More
  5. No Image

    벤저민 프랭클린 효과

    인생을 살다보면 정말 가까이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사람을 만난다. 안 만나면 그만일 때도 있지만 그 사람이 가족이나, 직장동료, 교회공동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질의 어려움을 겪을때에 힘들다. 건강의 문제가 생기면 더 힘들다. 하지만 인간관계의 ...
    Views1297
    Read More
  6. No Image

    달빛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집안에 들어서려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가 하늘로 향한다. 휘영청 밝은 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 오늘이 보름이구나!” 똑같은 달인데 머나먼 타국에서 바라보는 달은 그 느낌이 다르다. 역시 달은 고요 속에서 바라보...
    Views1540
    Read More
  7. No Image

    눈물로 씻은 눈만이 세상을 본다

    사람은 누구나 후회를 반복하며 인생을 이어간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가끔 만난다. 정말 그럴까? 과연 그런 인생이 가능할까? 존경보다는 묘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사실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자신을 되돌...
    Views1837
    Read More
  8. No Image

    고향집에 들어서면

    추석이다. 고국에서는 교통체증에 시달리면서도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고 있다. 처음 미국에 왔을때는 비디오 가게에 들러 VHS로 겨우 고향의 정취를 느껴야 했다. 이제는 유튜브가 있어 언제든지 향수를 머금을 수 있어 다행이다. 이민 생활 수십년이 명절에 ...
    Views1660
    Read More
  9. 밀알의 밤, 21년!

    가을이다. 사람들이 물어온다. “금년 <밀알의 밤>에는 누가 오나요?” 귀한 관심에 고마운 마음이 밀려온다. 무려 21년이다. 팬데믹이 아니었다면 23회. 처음 밀알의 밤을 열 때에 몹시 긴장하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희한하게도 그날은 단장으...
    Views2050
    Read More
  10. No Image

    마인드 맵(Mind Map)

    공자가 이런 말을 남겼다. “들으면 잊어버린다. 보면 기억한다. 행동하면 이해한다.” 그렇다. 듣는 것 같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우리는 오늘도, 한 주간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했다. 온갖 매스 미디어를 통해 수...
    Views2215
    Read More
  11. No Image

    결혼 일곱 고개

    가을이라 그런지 여기저기서 결혼 소식이 날아든다. “짝”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결혼을 약속한다. 결혼식 날은 오직 신랑 신부가 주인공이다. 화려하고 환상적이다. 꿈만 같다. 그런 나날들이 계속되면 얼마...
    Views2265
    Read More
  12. No Image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은 한편의 드라마가 아닐까? 전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내게 다가온다. 우리 집에는 17살 “쵸코”(요크샤테리아)가 있다. 쵸코가 우리집에 처음 왔을때에 아이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쓰다듬고 안아주고 산책을 하고 인...
    Views2349
    Read More
  13. No Image

    인생은 버릴 것이 없다

    가수 송창식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랐다. 서울예고에 입학했지만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의 삶은 방황과 노숙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그는 음악을 놓지 않았다. 홍대에 다니는 친구들을 따라다...
    Views2164
    Read More
  14. No Image

    영화 《Il Postino》

    때로는 아련한 추억을 되살아내게 하는 영화를 만날 때가 있다. <일 포스티노> 이태리 말로 “우편배달부”이다. 1950년대 칠레에서 정치적 이유로 망명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이탈리아의 작은 어촌 마을에 머물게 된다. 이 마을의 젊은이 마리오...
    Views2274
    Read More
  15. No Image

    세월이 남긴 고운 잔향

    누구나 만나면 습관처럼 주고받는 인사가 있다. “세월 참 빠르다.”이다. 마치 봄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듯 하루하루가 고요히 그러나 빠르게 우리 곁을 지나간다. 비슷한 연배의 사람을 만날 때는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새 ...
    Views2144
    Read More
  16. No Image

    비빔밥, 맛의 교향곡

    사람들이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망설임 없이 메뉴를 고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흐름을 좇아 메뉴를 결정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심각하지 않은 ‘결정장애’를 안고 산다. 예를 들어, 중화요리...
    Views2236
    Read More
  17. 30회 밀알 사랑의 캠프

    수십년의 세월동안 밀알사역을 감당하며 스스로 놀랄때가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을, 이토록 놀라운 사역을 46년간 이어올 수 있었을까?’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주님의 능력을 본다. 하나님이 장애인들을 얼마나 끔찍하게 사랑하시는지를 피부로 ...
    Views2110
    Read More
  18. No Image

    광화문 연가

    그 사람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세대가 드러난다. 나이가 들면 트로트를 즐겨 듣는 것 같다. 나는 희한하게 그 음악이 부담스럽다. 어렸을때는 남진 흉내를 곧잘 내기도 했건만 이상하게 트로트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요즘 아이돌 가수들의 무대를...
    Views2463
    Read More
  19. No Image

    언어의 온도

    언어에는 온도가 있다. 얼굴과 삶에도 온도가 있다. 어떤 말은 마음을 포근히 감싸 안고, 어떤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던졌지만 가시처럼 꽂혀 오래도록 마음에 남게 만든다. 사람의 얼굴에도 온도가 있다면, 그 온도는 아마도 그의 말투와 미소에서 비...
    Views2363
    Read More
  20. No Image

    숨겨진 정원 가꾸기

    가정은 정원과 같다. 어떤때는 나만 바라보지만 때로는 지나가는 사람이, 어쩌다 들른 사람들이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차를 몰고 거리를 지난다. 대로를 갈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주택가를 지나갈 때가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앞마당이다. 주차장과 ...
    Views2191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9 Next
/ 39

주소: 423 Derstine Ave. Lansdale., PA 19446
Tel: (215) 913-3008
e-mail: philamilal@hotmail.com

© k2s0o1d4e0s2i1g5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