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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만나면 습관처럼 주고받는 인사가 있다. “세월 참 빠르다.”이다. 마치 봄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듯 하루하루가 고요히 그러나 빠르게 우리 곁을 지나간다. 비슷한 연배의 사람을 만날 때는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새 장성해 버린 아이들. 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손주들을 볼 때면 세월의 속도에 새삼 놀라게 된다.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을 줄 알았는데 짝을 만나 가정을 꾸미고, 이제는 손자로부터 “엄마”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하다. 그 모습이 흐뭇하면서도 어쩐지 가슴 한편에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아마 나보다 앞서간 이들도 이런 과정을 겪으며 인생의 황혼을 맞이했을 것이다.

 

 몇 해 전부터 내 삶에 일어난 현상은 석양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이른 저녁을 먹고 카페 창가에 앉아 담소를 나누다 문득 서쪽 하늘을 수놓는 황혼을 보면 설명하기 힘든 아련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조용히 피어난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이 하루의 피곤을 어루만지고 내 마음까지 물들이는 순간이 그때이다.

 

<2025 칼럼집 수록>

 누군가 “목사님은 여전히 그대로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오면 겉으로는 “그럴 리가요?” 하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그 말 속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음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밀알선교단 내 방에는 처음 부임해 찍은 단장 취임식 사진이 벽에 걸려 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걸어둔 것이지만 이제는 어쩐지 낯설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리라. 늙어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이 피할수 없는 고귀한 과정이다.

 

 기억이 가물거릴 만큼 오래 전, 절친 ‘밥퍼’ 최일도 목사가 뉴저지 제일장로교회 부흥회 강사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적이 있다. 예배 시간에 특별찬양까지 했다. 예배를 마치고 한 자매가 눈시울을 붉히며 다가왔다. “목사님, 저 모르시겠어요? 저 혜란이에요.” 처음에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누구라고요?” 하고 되물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천호동 동부교회에서 중·고등부 전도사로 사역하던 시절 피아노 반주를 맡았던 그 소녀였다.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그것도 미국 땅에서 마주했으니 쉽게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청초하던 외모는 이제 중년의 빛을 품은 ‘엄마’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알고보니 그녀는 그 교회의 부목사 사모로서 두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그 만남은 짧게 스쳐 갔지만 오랫동안 내 마음에 잔잔한 울림으로 남아있다.

 

 나이가 들면 가장 먼저 변하는 건 머리칼 같다. 젊은 날엔 풍성해 주체하지 못하던 머리숱이 이제는 고개를 아무리 흔들어도 미동조차 없다. 피부는 예고 없이 서서히 내려앉고, 눈은 점점 건조해져 불안감을 준다. 옛 어른들은 “인생은 60부터”라 했다. 한때는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가 유행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노년에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욕심’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노욕(老慾)’이 무섭다고 하는 것일까? 故 한경직 목사님은 말년에 누군가와 대화하다 남의 이야기가 나오면 살짝 몸을 돌리셨다고 한다. 좋은 말만 듣고, 좋은 것만 보려 애썼다는 의미이다. 노년의 삶을 우아하게 만드는 묘약은 ‘사랑, 여유, 용서, 아량, 부드러움’이다.

 

 비록 기력은 예전 같지 않아도, 덕(德)은 노년에 절정에 이른다. 덕은 스스로에게 엄격해지는 데서 시작된다. 삶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남은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 오늘도 시계의 초침은 쉼 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시간은 우리에게 잔혹하고도 공평하다. 기력이 쇠할수록 마음은 더 넓고 깊어져야 한다.

 

 봄. 여름. 가을과 함께 변해가는 들녘의 흐름에는 다 비워내고 침묵으로 가는 들판의 고요함이 있다. 삶의 흐름 속에 경험해 온 시간만큼 평온 할 줄 아는 지혜가 충만한 노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세월이 남긴 잔향을 맡아본다. 어차피 인생은 미완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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