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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30 17:05

가을은 다시 창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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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라의 여름은 한국처럼 끈적거리거나 따갑지 않아서 좋다. 가는 곳마다 울창한 숲이 우거져있고 간간히 숲을 적시는 빗줄기가 있기에 그렇다. 한낮에는 기온이 치솟다가도 밤중에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처음 미국 L.A.로 이민을 왔다. 사철 화창한 날씨는 마음에 들었지만 가끔은 가슴을 적시는 빗소리가 그리웠다.

 

 그러다가 필라델피아에 와서 그리운 빗줄기를 만났다. 그해 여름은 희한했다. 낮에는 찌는 듯한 더위가 기승을 부리다가도 밤이면 시원하게 소낙비가 쏟아져 대지를 식혀주었다. 아침 출근길에 마주하는 필라의 풍경은 얼마나 싱그러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필라델피아에 젖어 산지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리던 아이들이 가정을 꾸미고 엄마가 되어 분주히 육아를 하고 있는 모습. 식당과 은행에 들어서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해오는 풍경을 보며 내가 분명한 필라 사람임을 실감한다. 타주에 출타했다가 필라 공항에 내릴 때, 차를 몰아 먼길을 갔다가 필라가 가까워지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다.  한 곳에 정을 주고 사람들을 사귀고 삶의 이야기를 이어간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인 것 같다.

 

 무척이나 길고 무더웠던 여름이 서서히 자취를 감춰가는 듯 하더니 어느새 가을 한복판에 서있다. 젊은 날에는 가을이 오면 가슴이 설레었다. 가을은 무언가를 내 가슴에 안겨줄 것 같은 기대감이 가슴을 뛰게 했다. 하지만 이제는 가을을 느끼기보다 한해의 끝자락이 보이면서 나이가 숫자를 더해야 한다는 사실이 은근히 부담이 된다. 가을은 원래 “갈”에서 왔다. 그 말처럼 금방 지나가버리는 것이 “가을”이다.

 

 세월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지 말라고 가을은 화려한 옷을 보여주며 우리를 현혹한다. “단풍”이라는 것이 사실 초록이 지쳐 만들어진 나무 편에서 보면 슬픈 자화상임에도 그 황홀한 모습에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세월의 흐름을 잠시 잊어버린다. 지난 월요일 장애인들과 포코노 숲으로 단풍 구경을 갔다. 신비, 비경, 황홀감에 젖어 가을 숲속을 거닐었다.

 

 한국의 가을녁은 온통 황금물결이리라! 익어가는 벼 이삭 위로 참새 떼는 먹을것을 찾아 군무를 춘다. 논 가운데 서있는 허수아비의 모습이 너무 인자로워인지 참새들은 겁 없이 곡식을 축내고 있다. 둥근 호박은 붉은 빛을 띄우며 조화를 이루고 서서히 잎새들을 떠나보내며 알알이 익어가는 ‘감’이야말로 예술 그 자체이다. 부지런한 농부들의 손길이 갖가지 농산물을 어루만지며 가을은 풍요로움을 더해 간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모두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지었다. 굴뚝을 타고 나오는 연기가 자욱이 마을을 감싸고 나무 타는 냄새와 구수한 밥 냄새가 버무려져 코끝을 스치며 기분 좋은 현기증을 일으켰다. 산마루에 걸린 석양과 어우러져 어린 가슴에 동화를 심었다. 그렇게 내 가슴은 부자가 되어 이 지면에 그 가을 이야기를 토해내고 있다. 가을이 깊어가면 마당 한가운데를 맴도는 고추잠자리를 만난다. 잡힐듯이 잡히지 않는 고추잠자리 떼는 그렇게 돌고 돌고 또 돌며 가을을 돌려댔다.

 

 인생은 계절과 같다. 어린 시절을 봄이라고 한다면 청 · 장년시절은 싱그러운 여름이다. 그러고보면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가는 우리 세대는 “가을”이다. 가을은 아름답다. 가을은 풍요롭다. 가을은 가꾼 사람의 가슴에 열매를 안겨준다. 그러면서도 가을은 냉정하다. 젊은 날에 땀을 흘리고 최선을 다해 달려온 만큼만 결과를 돌려주기 때문이다.

 

 가을을 즐기기 전에 가을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에게나 가을은 온다. 아직 자신이 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래서 언젠가 찾아올 가을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가을을 지나고 있는 분들은 이 가을을 즐겨야 한다. 왜냐하면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기 때문이다.

 

 인생의 사계절이 흐르고 나면 내세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그것은 내게 생명이 존재하고 있을때에 이미 결정된다. 따라서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 가을이 더 의미있고 행복한 계절이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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