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러보면 다 건강해 보인다. 장애인들은 거동이 불편하여 눈에 띄지 않을 뿐. 저 뒤편에서 장애를 안고 허덕이며 살고 있다. 처음 밀알선교단 단장으로 부임하였을때만 해도 전신마비 장애인이 네 분이나 있었다. 말 그대로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던 양판수, 황승수 집사님, 서돌근 형제, 정용 형제. 야속하게도 하나둘 천국으로 떠나가셨다. 심방을 가면 무척이나 반가워하던 그분들의 해맑은 미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한국 밀알선교단을 창단한 이재서 박사는 시각장애인이다. 그는 태어날 때 건강한 몸이었다. 멀쩡하던 눈이 1965년 겨울부터 점점 침침해 지더니 결국 15세에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이재서 소년은 절망의 깊은 계곡을 헤매야만 하였다. 활발하게 동네를 뛰어다니던 소년은 그날부터 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의사로부터 “현대 의학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는 순간, 그 슬픈 현실 속에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죽음을 결심했지만 분노 때문에 그는 자살을 시도하다가 포기 해 버렸다. 감나무에 끈을 묶고 목을 매달려고 몇 차례 시도하다가 “이대로 죽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죽을 수조차 없었다. 실명을 하고 겪은 그의 정신적, 육신적 아픔은 이 짧은 지면에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길고 지루한 과정이었다.
이재서 학생이 진취적인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은 1973년 5월,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 집회에 참석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부터였다. 복음의 능력은 중도 실명한 이재서에게 꿈을 꾸게 했다. 그 당시에 소감을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새로운 나라로 와보니 모든 것의 답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경험하며 새로운 세계로의 노정을 시작한다.
1979년 10월 16일, 총신대학교 재학중이던 이재서 전도사는 그토록 꿈꾸어 왔던 장애인 선교단을 창단하기에 이른다. 이름하여 “밀알선교단”. 성경 요한복음 12:24을 근거로 그는 한 알의 밀알을 이 땅에 심은 것이다. 창립 예배에 참석한 숫자는 겨우 20여명. 그 자그마한 모임이 오늘 세계를 덮어 갈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밀알선교단이 장애인 선교 단체로 인정을 받으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1984년, 이재서는 갑자기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에 아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세계 장애인 선교의 거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유학에 도전한다. 그가 유학의 닻을 내린 곳이 필라델피아이다. 필라델피아 성서 대학교(P.B.U)를 거쳐 템플대 대학원 석사(사회복지 행정). 럿거스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 정책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
필라델피아에서 공부하는 중에 그는 미국 땅에 최초로 밀알선교단을 창립하게 된다. 1987년 2월 5일, 그와 장애인 선교에 마인드를 같이하는 몇몇분들과 선교단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초기 필라 밀알선교단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책임을 맡아 고군분투한 분이 손갑원 총무(기쁨의 교회 장로. 보험사 운영)이다. 가끔 자리를 같이하면 그 당시 고생하던 일들을 피력한다.
그 후 단장을 맡은 분이 황성기 목사님이다.(현, 아리조나 인디언 선교사) 단장 사역을 감당하는 중에 사모님이 암 투병을 하는 비운을 겪는다. 암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함께 차를 타고 다니며 장애우들을 심방하고 사랑하던 황 목사님 부부의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남아있다. 특유의 친화력과 긍정적인 사고는 밀알선교단의 사역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
2003년 7월 10일. 나와 가족이 3대 단장으로 부임하며 필라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어느새 23년. 한 연약한 시각장애인이 심은 밀알 하나! 강물처럼 39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 이곳에서 장애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새싹이 트고 서서히 대지가 깨어나듯 2026년에도 장애인들에게 새 소망을 심으며 밀알 40년을 향해 달려 나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