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진정 기다림인가? ‘조카가 그리 예쁘다지만 저렇게 좋아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동생의 아들을 큰아이는 자주 찾아가 보살폈다. 한편으로 ‘저 가정에도 아이가 태어나면 좋겠다.’ 생각하며 기도했는데 드디어 임신을 했을 때 뛸 듯이 기뻤다. 그리고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도래했다. 남들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이 들리면 금방 출산을 하는 것 같던데 시간이 정말 안갔다. 드디어 손녀가 태어난 시간은 0시 3분. 감격의 시간이었다.
나는 중 3때. 한 소녀를 만났다. 한 학년 아래 훤칠한 키. 고른 치아. 그래서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던 아이. 그 아이를 만난 때는 늦가을이었다. 양평은 남한강을 끼고 있다. 낙엽이 흩날리던 미루나무 숲을 거닐었다. 강상과 양평을 이어주는 기나긴 다리 가로등을 세어가며 우리들만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 해 가을은 내 생애에 진한 향기로 남아있다.
문제는 겨울이었다. 그 애는 스케이팅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오빠, 나 친구들이랑 스케이트 타고 올게” “알았어. 재미있게 타다 와!” 쿨한 척 했지만 그 시간을 내게 고역이었다. 자취방에서 그 아이가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지루하고 길게 느껴졌다. ‘내 다리가 성했다면’ 탄식이 절로 나오던 순간이 그때였다.
그러다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고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웃을지 모르지만 그때만 해도 양평과 서울은 장거리였다. 역마다 정차하는 완행열차는 더디기가 한이 없었다. 지금은 전철이 오가는 짧은 거리건만 그 당시에는 멀고 멀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서울에 갈 일은 별로 없었고, 그래서 내가 서울에 간다는 것은 그 아이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열차에 올라 차가 움직이자 그 아이는 내 손을 놓지 못하고 내내 “오빠, 난 어떻게 해” 눈물 지었다.
그리고 몇 차례, 청량리에 있는 우리 집을 친구와 찾아왔다. 그렇게 몸이 멀어지며 아스라이 잊혀져 갔다. 1970년대는 모든 것이 느렸다. 내가 상경하던 1972년. 서울은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었다. 종로는 아수라장이었다. 특히 10대들이 모여드는 종로 2가 YMCA. 건너편 고려당 앞은 공사 철판과 자재가 널부러져 복잡했다. 그 와중에도 방과후 친구들과 함께 화신, 신신백화점을 유유자적하게 누비며 추억을 쌓았다.
당시 통신장비는 공중전화가 유일했다. 거리마다 공중전화 부스가 즐비했다. 바쁠 때는 줄을 서서 통화 차례를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동전을 넣으면 “뚜~~~”하는 소리가 들리고 조심스럽게 다이얼을 돌린다. 숫자를 돌리며 표현하기 힘든 기대감이 올라온다. 동전이 떨어지며 상대방이 “여보세요?” 화답하며 짧은 대화가 시작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들은 말이 길다. 통화가 길어지면 뒤에 서 있던 사람의 눈총이 시작된다. 마음 조리며 나누던 통화 시간은 참 낭만이 있었다.
이제는 손에 손에 전화기가 들려져 있다. 화상통화는 물론이고, 이제는 음성이 아닌 메시지로 교감이 이루어진다. 편리하다. 간편하다. 신속하다. 하지만 관계는 점점 드라이 해 져 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기다릴 줄 모른다. 진득, 침착, 여운이 사라진 지 오래이다. 당시 또 다른 소통 수단은 편지였다. 상대를 생각하며 꼼꼼하게 써 내려가는 손 편지. 가을 단풍을 말려 편지와 동봉하여 발송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답장이 온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 때에 설레임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편지를 읽으며 정감은 깊어갔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기다림 끝에 느껴지는 사람 냄새가 삶을 풍요롭게 채워 주었다. 기다림은 인류의 과제이며,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조급해서 이룰 일은 전혀 없다. 기다려야 한다.
넘어지기도 하고 실망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기다리면 성취되는 생의 신비를 깨달아야 한다. 빨리 이루어진다고 축복이 아니다. 기다림의 숙성을 통해 내 가슴에 안겨 오는 것이 진정한 보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