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되돌아보면 어렵사리 들어간 고교 시절이 가장 그립다. 우리 학교는 미션스쿨이었다. 입학하자마자 각종 동아리에서 회원들을 모집하느라 쉬는 시간이면 들어와 홍보에 열을 올렸다. YFC. CCC는 신앙단체였고, RCY(청소년 적십자)는 이미 유명했고 음악 모임도 있었다. 어느날, KSCF(한국고교기독총연맹)팀이 반에 들어왔다. “조은원”형(고3)은 다부진 체격에 달변가였다. 입에 짝짝 붙게 홍보하는 은원형에 말빨에 반해서 즉석 가입을 하게 되었다.
KSCF는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 예배를 드리고 모임을 가졌다. 2학년 선배중에는 신앙이 깊은 형들이 있었다. 후배들이 신앙의 기초를 쌓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솔직히 나는 신앙보다는 선후배들이 끈끈하게 어울리는 분위기가 좋았다. 한달에 한번은 종로 5가 연지동 기독교회관 강당에서 70개 소속 학생들이 연합하여 모임을 가졌다. 그 모임은 실로 꿀맛이었다. 공식적으로 여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학교였다. 그 당시에는 고교등급이 뚜렷했다. 경기, 경복, 서울고교는 일류, 용산, 경동, 사대부고, 중앙고교에 이어 신일, 대광, 보성으로 이어졌다. 여학생들은 학교로 남학생들의 등급을 나누고 교제를 결정했다. 따라서 경기, 경복, 서울 고교생들은 선택의 폭이 넓었다. 들리는 말에 그 아이들은 낮에 다니는 것을 수치로 생각했다나? 그래서 방과 후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주로 저녁에 이동하는 것을 덕목으로 여겼다.
나는 한영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런 학교도 있었어?’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인문계였지만 씨름으로 더 유명했다. 씨름판의 신사 “이준희”는 동기동창으로 우정을 나누었다. 레슬링 방대두, 세계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 박찬휘. 테헤란 아시안게임(1974년)에서 금메달을 따고 입성한 박찬휘는 우리의 우상이었다. 워낙 과묵해서 말을 건네기가 어려운 성격이었다.
고교 2학년. KSCF 서울연맹 총회가 열렸다. 학교 수준은 떨어졌지만 나는 과감하게 출사표를 던졌다. 승산이 없는 진정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나는 당당히 상대편을 꺾고 회장에 당선되었다. 선천적인 특유의 친화력이 효과를 본 것이다. 그 순간이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자신감과 긍지를 갖게 하는 자산이 되었다.
70개 고등학교 대표들을 이끄는 리더십은 목회를 해오면서 내 삶에 엄청난 에너지를 주고 있다. 그해 여름 정신여고 강당에서 열었던 전도대회에서 회장 인사를 통해 분위기를 잡았고 그때부터 나의 리더십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경험이 오늘 밀알의 밤을 개최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으니 진정 인생은 버릴 것이 없다.
세월이 흘러 내 모교는 <한영외국어고등학교>로 성장하며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자랑스러운 동문들도 많다. 영락교회를 담임하던 박조준 목사님, 세계적인 디자이너 앙드레김,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가 김상현 국회의원, 최근 고인이 된 조류학자 윤무부 박사, 그리고 배우 욘사마 배용준까지. 이들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나 또한 한영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생긴다.
KSCF를 통해 한국 민주화의 줄기를 보았다. 당시 대학 서클에는 김민기 선배, 서충령 선배가 있었다. 실로 전성기였다. 나는 가을이 되면 RCY 문예발표회와 각 교회 문학의 밤 게스트로 초청되어 노래를 불렀다. 봉채와 친구들이 기타를 들고 도우미 역할을 했다. 지금도 만나면 고교시절을 회상하며 한바탕 웃음꽃을 피운다. 다 교회 장로, 안수집사로 충성하고 있다.
돌아보니 고교 시절은 단순히 학창의 추억이 아니라, 내 삶을 형성한 토대였다. 신앙과 우정, 그리고 리더십의 씨앗이 그때 싹텄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그 모든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장애를 가진 나를 스스럼없이 대하며 힘이 되어 준 친구들이다. 힘들때나 웅변대회에 나갈 때, 그리고 가을 각종 문학의 밤에 출연할때에 친구들은 기타를 들고 내 곁을 지켰다.
세월이 날아가는 화살처럼, 세차게 흘러내리는 골짜기 물처럼 흘러버렸다. 아직도 젊은 정기를 잃지 않고 노년을 사는 비결은 고교 시절의 풍성한 추억때문이리라! 아, 옛날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