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일까? 나는 왜 거기 있지 않고 여기 있을까?” 이 질문은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첫 장면처럼 내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게 만드는 의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살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잊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내가 누구인가” 다른 하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다.
이 질문 앞에서 ‘무(無)’를 떠올린다. 無란 것은 텅 빈 공허가 아니다. 오히려 하얀 캔버스와 같아 무한한 가능성과 싱그러운 꿈을 담을 수 있는 존재다. 태어날 때 우리는 누구나 이런 가능성을 품고 세상에 나온다. 하지만 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사회라는 틀 안에 자신을 맞춰가며 점점 본연의 나를 잊어버리게 된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세상을 바꾸고 진보를 이루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기성 질서에 순응하지 않은 이들이다. 음악을 떠올려 보자. 내 세대를 기준으로 대중음악의 흐름은 유아기부터 청년 시절까지 뚜렷하게 변화했다. 초등학교 졸업 사은회에서 한 아이가 배호의 노래 “누가 울어”를 불렀다. “소리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로 시작하는. 노래를 얼마나 구성지게 부르던지 모두가 감탄했다. 어린 아이가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트로트가 대세였던 시간이 지나 발라드가 주류를 이루고 그 뒤로는 랩이 등장했다. 당시 기성세대가 이해하기 어려웠던 랩은 어린 세대의 삶과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버렸다. 그 한가운데 서태지와 HOT 그리고 ‘God’가 있었다. 그들은 음악을 통해 기존 질서를 깨고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어 주었다. 음악은 단순한 흥미와 즐거움이 아닌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통로였다.
그러나 참다운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단순히 외부의 자극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때로 ‘무(無)’를 마주해야 한다. 오염되지 않은 본연의 나를 창세 전에 조성된 순수한 나를 찾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나, 다른 사람에 의해 드러나는 나가 아니라 깊은 심연 속에 있는 나를 만나야 한다. 이를 위해 첫걸음으로 ‘알아차리기’ 훈련을 시작할 수 있다.
아주 기초적인 질문부터 던져 보자. ‘나는 걸을 때 오른발이 먼저 나가는가 왼발이 먼저 나가는가?’ ‘예배당이나 공공장소에 들어설 때 왼쪽으로 향하는가 오른쪽으로 향하는가?’ 조용히 앉아 자신의 들숨과 날숨을 느껴보는 것 그것이 첫 단추다. 윤동주 시인이 서시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읇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무’를 만나 자신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과 타인의 시선 속에서 길을 잃고 기존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편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본연의 나를 잊어버린다. 참다운 자신을 만나는 길은 외부의 평가를 벗어나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며 때로는 침묵 속에서 호흡을 느끼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나를 향한 스스로의 질문이다. “너는 오늘 왜 그런 말을 하고 그 행동을 했니?” 그 질문 속에서 나는 ‘무’를 만나고 비로소 나의 가능성을 떠올린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 나 또한 오직 하나뿐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살아갈 필요는 없다. 세상은 이미 충분히 많은 틀과 잣대로 가득 차 있으니 나는 나만의 길을 걸으면 되는 것이다.
무(無)를 만나고 자신을 알아차리고 타인의 시선을 잠시 내려놓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운 삶에 가까워진다. 음악과 예술 사소한 일상 속 경험 모두가 이 길을 돕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 안의 신성을 발견하고 나만의 의미를 가진 존재로 세상 속에 우뚝 설 수 있게 된다.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나일까?” 그리고 답을 찾으려 애쓰는 과정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 다워지고 있다. 끝나지 않는 질문 속에서 그 여정 자체가 곧 나의 삶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