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오늘이 며칠? 무슨 요일? 오늘 할 일이 무엇인지. 출근 시간을 확인하고, 약속이 있는 사람은 오늘의 일정을 생각할 것이다. 공통적인 것은 현대인들은 눈을 뜨자마자 휴대 전화부터 찾는다는 것이다.
가끔 이런 감격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눈을 뜬 것이 신기하고 “아, 오늘도 살아 있네.” 그런데 천천히 되뇌어 보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말이기도 하다. 염려가 사라져서가 아니다. 한가해서도 아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내가 원하는 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다. 새 아침 생명이 있음에 감격할 때가 있다.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있음에 감사가 밀려온다. 커튼을 젖히면 방안에 퍼지는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열어놓은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싱그럽다. 가을은 상념에 젖게 하여 한없이 좋다. 삶의 감격이 없는 이유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건강할 때는 건강이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하루 종일 많은 것을 보면서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별 감흥이 없다. 두 다리로 자유롭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르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몸이 아프고 나면 그제야 깨닫는다. ‘건강하기만 하면 좋겠다.’ 눈에 문제가 생기면 ‘눈만 잘 보이면 좋겠다.’ 종종 그렇게 건강하던 분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모습을 발견한다.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식당에 들어서는 모습에 놀란다. “저 분이?” 보행이 어려운 분들은 ‘두 발로 다시 걸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 열망한다.
사람들은 ‘The More’ 병에 걸려있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고 오늘도 그 욕심에 사로잡혀 생을 허비한다. 인생은 Just Now이다. 나는 만날 때마다 “목사님, 시간 될 때 식사 한번 해요”라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십년이 지났지만 그분은 여전히 만나면 그 인사를 반복한다. 어떤 젊은 목사는 “목사님, 제가 최고로 모시겠습니다”라면서 나를 강단에 세운 적이 한번도 없다. 헛웃음이 나온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지금 하지 않는 사람은 내일도 못한다. 오늘 용감한 사람이 내일도 용감하다. 오늘 행복한 사람은 미래도 행복하다. 건강할 때는 더 좋은 것을 원하고, 가진 것이 많아도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런데 정작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면 당장 하나만 되찾아도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한다.
행복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실 수 있는 것, 진한 향의 커피를 마시는 것, 내 발로 자유로이 걸을 수 있는 것, 운전하며 어디든 다닐 수 있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들과 오늘도 대화를 나누며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평범함 속에 행복이 깃들여 있다. 행복은 특별한 날에만 찾아오는 손님이 아니다. 매일 집 문 앞에 와 있는데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을 뿐이다. 사람들의 행복관은 거의 동일한 것 같다. 부자가 되면, 좋은 집과 차를 사면, 욕망이 충족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목표했던 그 미래에 도착하면 또 다른 미래를 바라본다. 하나를 얻으면 둘을 원하고, 둘이 오면 셋을 원한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잠시 기쁘다가 곧 익숙 해 진다. 내가 설교하며 자주 쓰는 말이 있다. “익숙해지면 감사가 사라진다” 그렇다.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보면 행복했던 순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음을 깨닫는다.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살았는데 정작 행복했던 날은 별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왜 그럴까? 행복은 나중이 아니다. 누구나 꿈은 필요하다. 꿈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진취적인가? 하지만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오늘이 내게 주어진 행복의 타이밍이다. 그래서 영어로 현재는 present(선물)이다. 멋지지 않은가? “오늘도 살아 있네.”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