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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08 15:36

아버지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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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서양철학의 두 거장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늙음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했다. 플라톤에게 노년은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시간이었다. 젊음의 혈기와 욕망이 한풀 꺾인 자리에 사유와 성찰의 여유가 찾아온다고 보았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늙음이 저절로 지혜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노년을 육체의 쇠약과 삶의 활력이 줄어드는 현실 속에서 바라보았다.

 

 필립 로스의 작품을 읽다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냉정한 시선에 가까운 노년과 마주하게 된다. 로스에게 늙는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를 먹는 일이 아니다. 몸이 먼저 늙고 기억과 관계와 욕망이 달라진다. 한때 당연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은 결국 자신이 사라질 존재라는 사실과 마주한다. 그의 노년은 쓸쓸하고 불편하지만 오히려 그 정직함 때문에 우리의 삶에 가까이 다가온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노년은 철학책이나 소설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노년은 어느 날 익숙한 풍경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내게 그것은 아버지의 부엌이었다. 아버지의 부엌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오래된 식탁과 손때 묻은 그릇이 있었고 냄비에서는 국이 끓었다. 도마 위에서는 채소가 썰렸고 아버지는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너무 오래 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귀한 장면인지 알지 못했다. 부엌은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던 공간이었다. 밖에서는 한 사람의 가장으로 살아가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지만 부엌에서는 말없이 가족의 끼니를 준비했다. 거창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 반복 속에는 아버지가 살아온 시간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냄비 하나에도 시간이 묻어 있고 오래된 칼 하나에도 손의 기억이 남는다. 한 끼의 음식은 더 이상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이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음식은 어느 순간 맛이 아닌 아버지의 손과 목소리와 표정으로 기억된다.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늙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조금씩 늙어갔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무거운 것을 들었고 어려운 일을 해결했으며 가족에게 닥친 문제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에게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늦게 깨닫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부엌에서 예전보다 작아진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게 된다. 느려진 움직임과 망설이는 손놀림을 보면서 깨닫는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이미 과거의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역시 언젠가는 사라질 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음은 슬프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하다.

 

 아버지의 부엌은 과거에 대한 추억만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비추는 거울이다. 필립 로스가 보여준 노년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도 다른 한편의 진실을 본다. 늙는다는 것은 잃어가는 일이지만 동시에 살아온 것을 갖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부엌에서 끓던 국처럼 삶은 오래 끓여야 비로소 제맛이 나는지도 모른다. 젊은 날에는 그저 평범한 한 끼였던 것이 시간이 흐른 뒤에는 한 사람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나간 삶의 평범한 순간들이 얼마나 귀했는지를 깨닫는 시점이다. 어쩌면 그것이 노년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쳐주는 지혜인지도 모른다.

 

 젊음의 즐거움이 새로운 것을 얻는 데 있다면 노년의 즐거움은 이미 가진 것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데 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삶 속에서 무엇이 소중했는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부엌을 떠올리면 조금 천천히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한 끼의 음식에도 마음을 담고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고 평범한 하루를 소중히 기억하면서. 아버지의 부엌은 오늘도 내게 말한다. 삶은 결국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누구와 나누며 살았는가로 기억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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