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현관문을 열다가 문득 멈춰 섰다. 공기가 달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어딘가 눅눅하게 매달려 있던 여름의 끝자락이 하룻밤 사이에 말끔히 걷혀 있었다. 대신 얇고 서늘한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한참을 문턱에 서서 생각했다. 아, 가을이 왔구나! 아니, 가을이 가을하고 있구나.
‘가을하다’라는 말은 사전에 없다. 하지만 이 말이 아니고서는 이 계절을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봄은 ‘온다’고 하고 여름은 ‘덮친다’고 한다. 겨울은 ‘내려 앉는다’고 하는데, 가을만은 오는 것도 아니고 덮치는 것도 아니다. 가을은 그저 가을한다. 스스로 물들고, 스스로 여물고, 스스로 떨어지면서 제 할 일을 조용히 해낸다. 누구에게 보이려는 기색도 없이 말이다. 그러나 누구도 외면할 수 없게.
어릴 적 외할머니 댁 마당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가을이 깊어지면 그 나무는 잎을 먼저 다 떨어뜨려 놓고 주황빛 감만 가지마다 등불처럼 매단 채 서 있었다. 할머니는 장대 끝에 망을 달아 감을 하나씩 따셨고, 나는 그 아래서 두 손을 모아 받는 시늉을 했다. 높은 가지 끝에 남겨둔 몇 개의 감을 가리키며 할머니는 말했다. “저건 까치밥이다. 다 따면 못 써.” 어린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거두는 계절에도 남겨두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가을이 가장 풍성한 순간에도 가장 너그러울 수 있다는 것을.
가을의 빛은 여름의 빛과 결이 다르다. 여름 햇살이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이라면 가을 햇살은 낮게 속삭이는 사람 같다. 오후 네 시쯤 비스듬히 들어온 빛이 창가 책상 위의 찻잔을 비추면 김이 피어오르는 모양까지 또렷이 보인다.
가을은 소리로도 온다. 희한하다. 귀뚜라미 소리가 유난히 한결 또렷 해 진다. 밤이면 창문 틈으로 풀벌레들이 저마다 마지막 노래를 부른다. 냄새로도 온다. 갓 구운 밤의 고소함, 따뜻한 차에 우러나는 계피 향, 오래 넣어둔 스웨터를 꺼낼 때 훅 올라오는 옷장 냄새. 그 냄새들은 기억의 문을 열어젖힌다. 교복 소매 끝에 묻어 있던 운동장 흙먼지, 끝내 건네지 못한 편지, 도서관 창가에서 졸던 오후까지. 가을은 감각으로 시간을 거슬러 오르게 하는 계절이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갈을 갈한다’는 것이다. ‘갈’ 금방 가버린다. 그래서 신계행은 <가을사랑>이란 곡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가을아 가을. 오면 가지말아라” 애절하다. 또한 가을이 아릅다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해가 짧아지면서 퇴근길의 하늘은 점점 일찍 어두워진다. 괜히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보고 싶은 얼굴이 하나둘 떠오르는 것도 이맘때다.
길을 걷다 발밑에서 바스락 소리가 나면 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 낙엽은 떨어지면서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나무는 잎을 놓치는 것이 아니라 놓아주는 것이다. 붉게 타오르던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가장 먼저 지는 것을 보며 생각한다. 떠나는 일에도 품위가 있을 수 있다고. 끝은 실패가 아니라 완성의 다른 얼굴일 수 있다고.
가을은 정직하다. 땀을 흘린만큼 열매를 안기는 계절이 가을이다. 열매는 때가 되어야 익고, 잎은 때가 되어야 물든다. 느긋하게, 정직하게 제 속도로 가면서도 결국 가을은 가을을 해낸다. 가을이 가을하는 동안 나도 조금씩 나를 하고 있다. 덜어낼 것은 덜어내고, 남길 것은 까치밥처럼 남겨두면서.
언젠가 이 계절이 끝나고 앙상한 가지만 남더라도, 나는 오늘의 이 바람을 기억할 것이다. 올가을도 가을은 가을한다. 그리고 나는 그 곁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