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시절을 경기도에서 자랐다. 어쩌다 서울에 올라오면 별천지였다. 17살. 드디어 온 가족이 꿈에 그리던 서울에 입성(?)한다. 친구들과 많이도 쏘다녔다. 마냥 좋았다. 고교 시절, 그리고 청년기는 서울과 함께 숨을 쉬며 꿈을 꾼 시기였다. 21살, 신학대학에 들어가며 모든 것이 멈추었지만 말이다. 나는 서울을 너무도 좋아한다. 패티 김의 <서울의 찬가>는 부르기만 해도 신이 난다.
꼬박 30년을 서울에서 살다가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늦깎이 이민을 왔다. 갑자기 서울을 노래하고 싶은 생각이 밀려왔다. 고교시절 학교가 파하면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종로거리로 내달았다. 2가 화신, 신신백화점부터 광화문까지. 그리고 길을 돌아 명동 뒷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1982년 발표된 이용의 <서울>은 충격적이다.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그 길에서 꿈을 꾸며 걸어가리라” 종로에 사과나무를? 놀랍다. 요즘 종로거리 도처에 사과나무가 눈에 띈다.
동네 이름을 따라가다 보면 또 다른 서울이 나타난다. 종로는 젊음이 머물던 거리이다. 2가 YMCA 회관 맞은 편에 고려당과 종로 서적, 을지 문고가 자리했다. 극장과 서점, 다방이 어우러져 젊은이들이 만나고 사랑을 키우던 거리였다. 누군가에게는 첫 데이트의 장소였고 우리에게는 잊혀진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무대였다.
나는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즐겨 부른다. 지난 밀알의 밤에도 밴드에 맞추어 열창했다. 광화문과 정동길을 아련한 추억의 공간으로 만드는 노래이다. 덕수궁 돌담길과 가을 낙엽을 떠올리면 함께 걷던 사람의 모습이 겹쳐진다. 1985년 가을, 은행잎이 눈처럼 쏟아지던 덕수궁 분수대 앞에서 나는 한 여인에게 프로포즈를 하였다. 그렇게 40년을 부부로 살고 있다.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매력적인 저음과 목소리와 감성을 지닌 가수가 있었다. 배호. 그는 〈돌아가는 삼각지〉 지명 하나에 이별의 쓸쓸함을 담았다. 원효로를 지나 삼각지를 만나면 사람들은 그 노래를 기억했다. 돌아간다는 말에는 길을 따라 움직인다는 뜻과 지나간 사람을 다시 찾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함께 담겨 있다. 그렇게 그는 젊은 날(29세) 돌아가고 말았다.
신촌은 가슴이 뛰는 동네이다. 신촌은 대학과 음악, 젊음의 열기로 기억된다. 이대 정류장에서 내려 골목길에 접어들면 고즈넉한 캠퍼스가 나타난다. 여사친 덕분에 축제때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내가 다니던 고교는 왕십리 근처에 있었다. 김흥국의 〈59년 왕십리〉는 한 시대의 기억을 담았다. 왕십리에는 튀김 골목이 유명했고, 10대들이 몰려드는 시장통이었다. 이제는 지하철과 상업시설이 어우러진 도시의 중심지로 변해버렸다.
서울은 노래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서울의 동네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닌다. 종로에는 청춘이, 광화문에는 사랑이, 삼각지에는 이별이 있다. 신촌에는 지나간 젊음이, 강남에는 성공과 욕망이, 왕십리에는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다. 노래 속 지명을 살펴보면 도시의 변화뿐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꿈꾸고 무엇에 아파했는지도 엿볼 수 있다. 오늘날의 성수동과 망원동, 익선동 역시 언젠가는 새로운 세대의 추억을 담은 노래의 배경이 될지 모른다.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서울 지도를 가지고 있다. 등교하던 길, 첫 직장으로 출근하던 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골목, 사랑하는 사람을 배웅했던 정류장이 그 지도에 표시되어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한 장소지만 자신에게는 인생의 한 페이지이다. 도시는 건물과 도로로 이루어 지지만 그곳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기억이다.
노래는 사라진 가게를 되살리지는 못해도 그곳에서 행복했던 순간을 다시 불러낸다. 오래된 노래에서 익숙한 동네 이름이 들리면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서울의 한 장소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남겨 둔 자신의 젊은 날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울은 건물로 이루어지지만 기억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노래는 그 기억을 다시 걷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영주권을 받아 모처럼 서울을 두루 다니다가 인천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나의 뇌리에는 이미자의 <서울이여 안녕!>이 한참 동안 맴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