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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30 11:03

그 애와 나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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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풋풋한 사랑.jpg

 

 

  갑자기 그 애가 생각났다. 아무것도 모른 채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진학의 꿈을 향해 달리던 그때, 그 애가 나타났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서 전근을 자주 다니던 아버지(경찰)4살 위 누이와 자취를 하게 했다. 그 시대는 중학교도 시험을 쳐서 들어가던 때였다. 아버지는 중학교는 서울로 가야한다.”고 강조하셨기에 어떻게든 서울에 있는 중학교 진학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어린이 한국일보에 나온 시험지를 풀며 서울을 꿈꿨다. 하지만 입시제도가 변경되며 좌절의 쓴맛을 보아야 했다. 하지만 양평중학교에 7등으로 입학하며 아버지의 첫 칭찬을 들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한번 따놓은 명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

 

  3이 되자 아버지는 또다시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하셨다. 과외공부가 성행하던 그때. 학교 수업이 끝나면 영어, 수학 과외를 받게 되었다. 수학선생님은 남자분이었고 대략 8명 정도가 팀을 이뤄 사택에서 공부를 배웠다. 수학과외가 끝나면 여 선생님 댁으로 이동하여 영어과외를 받는다. 김영미자 선생님. 이름이 독특하게 4자였기 때문인지, 아리따운 외모로 인해서인지 세월이 지나도 선생님의 이름과 모습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김영미자 선생님 댁에는 우리 남중생들뿐 아니라 여중학생들이 팀을 이뤄 과외를 받았다. 시간이 교차하기에 가끔 스치듯 지나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때에 내 눈에 들어온 한 소녀가 있었다. 하지만 한 학년 아래 아이들이라는 말을 듣고 관심을 줄였다. 그때에는 한 살 차이가 너무도 커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우리는 운명처럼 만났다. 우연히 마주친 골목에서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아니니?” “아니? 내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아이는 여동생처럼 다가왔다. 그렇게 우리의 동화는 시작되었다.

 

  그 애와 나랑은 매일 만났다. 시골이라 눈에 띄게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고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는 때도 아니었기에 모종의 방법으로 접선(?)을 시도해야 했다. 당시 공개적으로 이성교제를 하는 것은 금기시되던 때였다. 하지만 풋풋한 사춘기 사랑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과 후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강가에서, 때로는 철길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신록이 우거져가는 숲에서, 낙엽이 눈처럼 날리는 가을의 품에서 우리는 마냥 푸르른날을 물들여 갔다. 그러면서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고, 작가가 되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자취방에 와보니 그 아이가 와있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누이는 내 친구들을 통해 내가 한 소녀를 만나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내고는 탈선을 할까봐 그 애를 만나 동생을 삼고 직접 집으로 초대를 한 것이었다. 풋풋하고 신비했던 그 애와의 사랑은 그렇게 색이 바래갔다. 이상하게 누이가 개입하고 나서는 흥미로운 만남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산에서 고이 자란 화초를 억지로 캐어내어 화분에 심어놓으면 그 향기와 자태를 잃어가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드디어 나는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합격을 했다. 양평을 떠나갈 때 기차역에 나와 눈물을 흘리던 그 애. “오빠 나는 어떻게 해?” 떠나가는 기차를 향해 한없이 손을 흔들던 그 애의 모습은 영화처럼 내 가슴에 남아있다. 차창에 기대어 저만치 멀어져가는 그 애의 애달픈 눈동자를 지켜보며 나는 어른이 되어갔다.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일까? 고교생활에 집중하다보니 편지도 뜸해지며 소식은 멀어져갔다. 고교 3학년 때였던가? 누이가 일하던 대왕코너에 와서 한참을 이야기하고 갔다는 것을 나중에야 전해 들었다. 우리 누이 참 짖굿다.

 

  남자는 처음 사랑을 잊지 못한다고 했던가! 깊어가는 가을. 갑자기 그 애가 생각났다. 멀쑥하게 큰 키, 자그맣고 하얀 얼굴, 애교가 철철 넘치던 말투, 이제는 누군가의 아내로, 할머니로 살아가고 있을 그 애와의 추억을 더듬으며 저만치 멀어져가는 어린 날의 초상을 떠올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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