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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스토리.jpg

 

 

  눈이 온다. 근래 큰 눈이 오지 않아 푸근한 겨울을 꿈꾸었건만 2월에 접어들며 벼르기라도 한 듯 폭설이 일주일 간격으로 퍼붓고 있다. 나는 처음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왔다. 낯선 미국 땅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 희미하게 잊혀졌던 사람을 먼 미국 땅에서 만나는 감격을 누리며 하루하루 신기하기만 했다. 코발트 색상의 하늘. 안개가 낀듯한 오전의 하늘이 서서히 벗겨지면서 맑디맑은 얼굴을 드러내면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L.A.천사들의 도시로 지칭했는지 실감하며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싱그러운 가을이 오고 겨울을 맞이하였다. 약간 쌀쌀한 날씨는 한국의 초봄 정도였다. 눈을 기다렸더니 친구가 하는 말 “L.A.에 무슨 눈이 와?” 그 한마디에 눈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했다. 눈 없이 맞이하는 성탄, 따스한 날씨 속에 바라보는 크리스마스트리. 정말 싱거웠다. 눈을 사무치게 그리워 한때가 그때였다.

 

  2003, 단장 임명을 받고 동부 필라델피아로 이주를 했다. 7월이었다. 숲은 싱그러웠고 온갖 위락시설이 준비되어있는 아파트가 좋았다. 드디어 기대하던 겨울이 왔다. 첫눈이 쏟아지던 날, 우리 온 식구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뛰어나가 눈밭에 뒹굴었다.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도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눈에 대한 마지막 유희였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퍼붓는 눈발에 넋을 놓아야 했고, 허리까지 빠지는 눈의 양에 질리고 말았다. 이후 눈은 낭만이 아니라 고문(?)이었다. 처음 밀알선교단에 부임하여 간사들에게 들은 말은 눈이 많이 오면 예배를 못 드린다였다. 초면이라 반응은 못했지만 분(忿)이 올라왔다. ‘눈이 온다고 예배를 중단해?’ 하지만 겪어보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때는 눈이 그렇게 많이 왔다.

 

  기후 탓인지 지금은 그때만큼 눈이 오지 않는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2021년 다시 눈이 찾아왔다. 나이가 든 탓일까? 이제는 눈보다 비가 좋다. 눈이 오면 일단 거동에 지장이 생기고 낙상할까 염려가 앞선다. 눈이 좋았던 때가 있었다. 눈만 오면 서울시내를 정신없이 쏘다니던 젊은날의 초상이 서서히 오버랩해 온다. 내 청소년기에는 그리 놀거리가 많질 않았다. 따라서 친구들과 어우러져 이리저리 쏘다니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낙()중에 낙이었다. 지금도 한국에 나가면 바쁜 일정 중에서도 만나는 부류가 고교동창들이다. 겨우 3년을 동문수학한 사이지만 그 시절에 1년은 10년이었음을 깨닫는다.

 

  어느 해던가! 눈이 무척이나 쏟아졌다. 청량리 대왕코너에서 뭉친 우리들은 마냥 걷기 시작했다. 눈을 지치고 눈을 뭉쳐 던지면서 마냥 걸었다. 시조사를 넘어 서울우유를 바라보며 망우리 쪽으로 방향을 틀어 수다를 떨며 걸었다. 포장마차에서 먹던 오뎅와 튀김 맛은 눈과 어우러져 꿀맛이었다. 중랑교를 넘어 오른쪽으로 걸어 답십리에 와서야 우리의 눈 여정은 끝이났다.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 무슨 그리 할 말이 많았던지? 눈이 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추억이다. 원없이 눈을 맞으며 몇시간을 걷고 걷던 그 시절이 무척이나 그립다.

 

  하면 잊지 못할 영화가 <러브스토리>이다. 동대문 야구장 앞 계림극장에서 처음 그 영화를 보았다. 명장면은 주인공들이 센트럴파크에서 뒹구는 눈싸움 장면이다. 눈도 화면도 모두 희어서 분간이 안되는 하얀 기억이 지금도 생생히 다가온다. 그러면서 깔리는 O.S.T. “snow frolic.” 깊은 눈동자를 지닌 알리맥그로우의 연기와 sad ending(백혈병)은 어린 내 가슴에 진한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잊지 못할 명대사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Love is never to say I'm sorry) 주인공 제니의 말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로 충분하다는 의미이다. 사랑한다면 미안함도, 서운함도, 그리움도, 원망도, 아쉬움도, 미움도, 희망도, 기대도 함축되어 분출되는 것이리라!

 

  어린 시절. 눈이 오고나면 온 동네가 조용했다. 들과 밭, 그리고 장독대에 소복이 쌓인 눈이 얼마나 곱고 예뻤던지! 동요처럼 바둑이와 함께 걸으며 내던 발자욱의 잔영이 되살아 난다. 눈을 좋아하고 그 깨끗함을 사랑하는 동심이 되살아나 오늘을 살아가는 에너지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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