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취향은 다양하다. 하지만 춥고 지루하고 변덕스러운 겨울을 지나 맞이하는 봄은 누구나에게 포근함을 안겨준다. 봄은 희망이다. 봄은 말 그대로 봄(view)이다. 죽은 듯 보이던 대지에서 파아란 새싹이 기지개를 켜고 얼었던 땅을 비집고 고개를 드러낸다. 얼마나 신기하고 예쁜지. 얼었던 시냇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기 시작한다. 가는 곳마다 다채로운 꽃들이 향연을 벌인다. 화창한 봄날의 햇살은 실눈을 뜨게 만들고 저만치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잊혀 젖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집 안마당에는 꽤나 큰 개나리가 자리하고 있다. 보름전이던가? 아직 기온이 찬데 성질 급한 나무가 노오란 꽃망울을 터뜨리며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몇해 전, 꽃이 피자마자 폭설이 내려서 피어보지도 못하고 시들해진 때가 있어서 걱정을 했는데. 아직까지도 그 자태를 마음껏 뽐내며 노란 광채를 뿜어내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피어난 개나리를 보며 동요가 흥얼거려졌고, 이내 “봄날은 간다”를 열창하기에 이르렀다. 봄에 느끼는 정겨움과 평화로움은 어머니의 얼굴과 오버랩되어 그리움이 가슴에 번져왔다. 포근함, 수수하고 정겨운 그런 얼굴말이다.
나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 누구보다 겨울과 봄의 교차점을 또렷하게 체험하며 자랐다. 긴장되던 몸이 나른해지고, 악동들이 들로 산으로 뛰어다닐 수 있는 계절이 봄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던 농부들이 정성들여 뿌린 씨앗을 보슬비로 보듬어 주는 것도 봄이다. 하늘거리는 버들가지가 바람에 날리면 가지를 꺾어 버들피리를 불어보는 그때도 봄이다. 겨우내 닫아두었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틈새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한껏 공기를 들이마시는 시간도 봄이다. 이리저리 거닐다보면 멋진 그림이 나올것만 같은 계절도 봄이다.
봄은 온갖 상상력을 펼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싱싱함, 소풍날 아침에 설레임. 무지개를 쫓아가는 신비감 등등. 봄이 아름답고 고마운 것은 겨울을 지났기 때문이다. 겨울을 꿋꿋하게 견뎌낸 사람만이 봄의 풋풋함에 감사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다. 우리는 학창시절 중간고사와 학기말 고사를 치르고 난 후에 후련함을 안다. ‘시험’이라는 말만 들어도 답답하고 암담하지만 그 시간들을 인내하며 학점을 땄고, 학년이 올라가며 졸업의 기쁨을 누렸다.
계절중에 봄은 속도가 가장 빠르다. 오는가하면 여름의 더운 기운이 엄습한다. 사실 봄은 느낄 겨를이 없다. 아직 겨울인가 하는데 따스함이 귓볼을 간지린다. 꽃의 향연에 들뜨고, 세상이 초록색으로 번져가는가 싶으면 어느새 여름이 무서운 기세로 밀고 들어온다. 하기에 봄을 느끼고 만져줄 때는 바로 지금이다. 바쁘고 분주하지만 봄이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것이 봄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김신영 시인은 “봄에게 미안하다. 이미 당도해 있는데 벌써 와 있었다는 부드러운 전언”이라고 읊조린다. 봄은 이미 왔다. 꽃샘추위로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봄은 깊숙이 자리를 잡고 그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젊을때는 몰랐다. 봄이 이렇게 소중한 줄을. 나이가 들어 곳곳에 피어있는 꽃을 마주하며 탄성을 지른다. 와우! 정말 멋지다. 옆집에 자그마한 벚나무는 봄을 기다리며 우산처럼 가지를 뻗고 있다가 제철을 맞아 그림처럼 피어나 자태를 뽐내고 있다. 무척이나 고상해 보인다.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는 노래 가사가 있다. 조붓하다? 사전을 찾아보니 ‘조금은 좁은 듯 하다’이다. 그렇다. 크고 화려한 곳에는 정겨움이 없다. 산업이 발달하다보니 이제는 내 고향에도 조붓한 봄기운은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뛰어놀던 동산에는 아파트가 산마루를 점령하고 있다. 미국에서 조붓한 봄을 느끼기에는 모든것이 넓기만하다. 그래도 곳곳에 공원이 있으니 다행스럽다. 그 공원 기슭에서 조붓한 봄맞이를 해야 할 것 같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들어보라!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마음을 가만히 실어보자. 힘차고 생기 있게 움직이면서도 결코 흐트러짐이 없는 질서와 리듬이 있다. 봄과 함께 지난날의 모든 쓰라림과 차가움은 겨울의 땅속에 묻혀 질 것이다.
<꽃필 날>
“내게도 꽃필 날 있을까? 그렇게 묻지마라. 언제든 꽃은 핀다.
문제는 가슴의 뜨거움이고, 그리움, 기다림이다”(나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