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가지고 생(生)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다. 건강한 몸을 가지고 살아도 힘든데 장애를 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버거운지를 당사자가 아니면 짐작하지 못한다. 나는 장애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한다. “목사님은 장애도 아니지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과연 그럴까? 그분을 향해 “나처럼 장애를 가지고 살아보시렵니까?”라고 되묻고 싶다. 그러면서 한편, 언뜻보아도 장애 때문에 힘들게 살아온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스럽기도하다. 장애를 가진 당사자가 힘든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가족들의 아픔은 가혹하리만큼 안타깝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세상을 살아 갈때에 끝까지 돌보아 줄 사람은 부모밖에 없다. 모성애의 극치는 장애아동 어머니라고 한다. 남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어머니에게는 그 자식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 인 것이다. 양유자 씨는 25세 된 다운증후군 아들을 둔 어머니이다. 평택에 살다가 지훈이가 밀알 보호 작업장에 다니면서 서울에 오게 되었다. 어느새 세월이 4년 반이 흘러갔다. 장애아들인 지훈이를 위해 강남에 집을 얻고, 지훈이의 출근을 돕기 위해 남편을 평택에 둔 채 자식을 따라 온 것이다.
매주 금요일 밤이면 모자(母子)는 평택으로 향한다. 지훈이는 평택 집을 “우리 집”이라고 하지만 빌린 집은 그런 표현을 하지 않는다. 서울에 와서 모자(母子)는 밀알선교단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3년 동안 양유자 씨는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아들을 데려가고 오는 일만하였다. 그러다가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따로 있겠다.” 싶어서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고 이제는 열혈회원이 되었다. “‘나 하나 없어도 되겠지’ 하는 마음보다는 일은 찾아서 해야 한다는 것”을 어머니는 깨달은 것이다.
결혼을 하고 드디어 아이가 들어서고 출산을 하게 되었다. 태어난 아들은 장애아였다. 병명은 다운증후군. 우유를 빨 힘이 없어 호스를 이용해 우유를 목으로 넘겨야만 하였다. 부모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지훈이가 태어난 그날부터 엄마, 아빠의 에너지는 아들에게 집중 되었고, “어떻게 하면 아들이 이 넓은 세상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할 것인가”를 위해 기도하며 아들을 키웠다. 양유자 씨는 아들을 키우며 깨달은 것이 있다. 아니 삶의 원리라고나 할까? 『첫째, 엄마는 우울증이 오지 않도록 정신 건강과 육신적인 건강을 위해 힘써야 한다. 둘째, 항상 가정이 화목해야 한다. 셋째, 아이의 장애를 숨기지 말고 Open해서 이웃 간의 유대 관계를 가지게 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졸업 후 아이의 직업을 찾아주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자식을 위해서 부모가 해 주어야 할 최선의 역할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깨달았다. 장애아동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엄마는 자식에게 묶여진 한 묶음이다. 하지만 “잘해 준다”는 것만이 자식을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은 아니다. 때로는 과보호가 아이를 더 나약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을 돌아보아도 아버지가 강하게 자라나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을 느낀다. 그 당시에는 많이 야속했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아버지는 진심으로 아들을 사랑하셨음을 깊이 느낀다.
지훈이의 나이는 25살이지만 정신 수준은 6살이다. 다운증후군 장애를 가진 아동들의 특징은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지훈이도 찬양하기를 좋아하며 그래서 예배시간이면 항상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마지막 일어서서 찬양을 하는 시간에는 마이크를 잡고 분위기에 빠져든다. 지훈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흐뭇하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을 엄마는 가슴으로 읽는다. 어머니는 참 위대하다.
그런데, 장애아동 지훈이 어머니인 양유자 씨가 이런 고백을 했다. “나는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어머니는 안 되고 싶다.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장애 자녀를 둔 어머니는 아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녀야 한다. 이제 나도 자유를 누리고 싶다.” 그 한마디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