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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6 15:02

가을 창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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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 찻잔.jpg

 

 

 사람마다 계절의 감각을 달리 느낀다. 여성들은 봄의 감성에 손쉽게 사로잡힌다. 나는 가을을 탄다. 가을의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면 원인 모를 외로움이 살며시 고개를 내어민다.홍릉의 가로수 마로니에 잎이 흐드러지게 날리는 것을 보며 사춘기를 넘어갔다.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는 정겨운 음악, 군고구마, 찐빵이 어우러지면 가을은 가슴으로 파고 들어왔다. 계절에는 향기가 있다. 봄은 아련한 향나무 냄새가 스물거리고, 여름에는 숲향과 갑자기 비가 쏟아질때면 기분 좋은 먼지 냄새가 번진다. 그러다가 가을의 습기 없는 바람을 쏘이다보면 가슴이 시원해 진다. 어느새 나무가 옷을 갈아입고 있다. 고운 색깔로 치장하는가 싶더니 정들었던 잎사귀를 낙엽으로 날리우고 있다.

 

 한국에 여동생이 갑자기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때에 가족사진이었다. 사각모와 졸업가운을 걸치고 졸업장과 함께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곁에 선 어머니. 이리도 고우셨던가? 이미 고인이 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곁에서 팔장을 낀 누이와 엄마 옆에 여동생. 헤아려보니 26살 때였다. 이제는 모두 손자손녀를 본 우리 삼남매의 그 옛날 단촐한 원가족 사진이었다. 여동생이 글을 달았다. “옛날 사진 보다가… 유일한 우리 가족사진이네” 그런 기회가 아니면 가족사진 한 장 남기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진정 남는 건 사진밖에 없는 것 같다. 필름을 넣어 갖가지 포즈를 취하며 셔터를 누르고 사진관에 맡긴 후 1주일 쯤 지나서 찾아가던 발걸음은 온통 설레임이었다. 인화된 사진을 유심히 감상하고 사진첩에 차곡차곡 진열해 덮고, 앨범을 꺼내 틈만 나면 들여다보던 그 때가 참 정겨웠다. 이제는 핸드폰으로 많이 찍어대기는 하는데 그만한 감흥은 날아간 지 오래이다. 그때보다 화상도도 훨씬 좋아졌는데 말이다. 사진에는 다 사연이 있다. 자연스럽게 그 시간으로 돌아가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울 수 있음이 사진이 안기는 매력이다.

 

 번민의 청춘, 그때는 죽을 것 같았는데, 인생이 거반 끝난 것만 같았는데. 이제 와 돌아보니 그토록 그립고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 사실 하나만 알아도 삶이 고단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젊은이들이 줄어들텐데.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던가? 어쩌다 한국에 가서 지인들과 만나 대화를 하며 그 사실을 실감한다. 평범했던 일보다 극적이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이 이어진다. 인품 좋았던 선생님도 기억이 나지만 집요하면서도 짓궂게 학생들을 괴롭히던 선생님의 이름과 별명은 또렷이 기억이 나서 긴 시간을 성토하며 추억을 더듬는다. 그래서 나온 말이 “성공자의 과거는 비참할수록 아름답다.”이다.

 

 추억은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미소를 번지게 하고 오늘의 내가 있음에 감사도 동반한다. 아름다운 추억이 많은 사람이 진정한 부자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추억은 현대 사회에서 차가워진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삶에 지치고 피곤한 몸을 쉬게 해 주는 힘이 있는 것이다. 왜 이리 세월은 빨리도 흘러가는가? 어느새 10월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가을의 한복판에 서있다.

 

 가을은 정직한 계절이다. 봄을 준비하고 여름에 비지땀을 흘린 사람만이 가을에 출렁이는 수확물을 바라보며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인생도 그렇다. 젊은날에 앞만보고 달려가던 영혼에게 응당한 열매를 안기는 계절이 가을이다. 차를 타고 숲속을 누빈다. 형형색색의 단풍이 차창에 아른거린다. 나풀거리며, 때로는 세차게 부딪히며 가을을 알린다. 싱그러운 여름에 무성했던 숲을 떠나 아쉬움의 손짓을 하며 날아간다. 그 잎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소설이 되고 시가 될 것이다. ‘가을은 짧지만 가을의 추억은 길다’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가을을 탄다는 것은 외로움만이 아니다. 깊은 사색에 잠기며 생을 돌아보는 진지한 계절이라는 의미이다.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고 싶다면 철이 안들어서일까? 매서운 추위가 오기 전에 가을의 숨결을 느낄수 있어 다행이다. 짙은 커피 향을 음미하며 창가에 앉아 가을의 숨결을 느껴본다. 잠시 주어진 여유와 내면에 다가오는 심오한 자연의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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