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K목사 앞에 일흔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 다가와 섰다. “저를 이 섬에서 살게 해 주실 수 없습니까?” 느닷없는 노인의 요청에 K목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에게는 모두 열 명의 자녀가 있었지요.” 자리를 권하여 앉자 노인은 한숨을 쉬더니 입을 떼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중의 한 아이가 문둥병(한센)에 걸렸습니다.” “언제 이야기입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그 아이가 열한 살 때였지요.”
발병사실을 알았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 아이를 다른 가족이나 동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뿐이었다. 소록도에 나환자촌이 있다는 말만 듣고 부자가 길을 떠난 건 그 해 늦여름이었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매우 불편해서 소록도까지 오는 여정은 멀고도 힘든 길이었다. 그러다 어느 산 속 그늘 밑에서 쉬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문득 잠에 곯아떨어진 그 아이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올라왔다. 바위를 들었다. 맘에 내키진 않았지만 잠든 아이를 향해 힘껏 던져 버렸다. 그만 바윗돌은 빗나가고 말았다. 이를 악물고 다시 돌을 들었지만 차마 또다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아이를 깨워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문제는 소록도에 다 왔을 때 일어났다. 배를 타러 몰려든 사람들 중에 눈썹이 빠지거나 손가락이며 코가 달아난 문둥병 환자를 정면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들을 만나자 아직은 멀쩡한 아들을 소록도에 선뜻 맡길 수가 없었다. 멈칫거리다가 배를 놓치고 마주 서있는 아들에게 심경을 이야기하게 된다. “저런 모습으로 살아서 무엇 하겠니? 몹쓸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함께 죽는 길을 택하자.” 부자는 나루터를 돌아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향했다. 신발을 벗어두고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한발 두발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가 거의 가슴높이까지 물이 깊어졌을 때였다. 갑자기 아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는 가슴높이였지만 아들에게는 턱밑까지 차올라 한걸음만 삐끗하면 물에 빠져 죽을 판인데 갑자기 돌아서더니 아버지의 가슴을 떠밀며 악을 써대는 것이었다. “문둥이가 된 건 난데 왜 아버지까지 죽어야 하느냐?”고 “형이나 누나들이 아버지만 믿고 사는 판에 아버지가 죽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겠냐?”고 소리를 쳤다. 완강한 힘으로 자기 혼자 죽을 테니 아버지는 어서 나가라고 떠미는 아들 녀석을 보는 순간, 아들을 ‘와락’ 껴안고 통곡을 했다. 죽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그 후 소록도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서울로 돌아와 서로 잊은 채 정신없는 세월을 보냈다. 아홉 명의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을 나오고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를 낳고…. 얼마 전에 큰 아들이 “시골의 땅을 다 팔아서 함께 올라와 살자.”고 했다. 처음 아들네 집은 너무도 편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되고 이불 펴주면 드러누워 자면 그만이고. 가끔씩 먼저 죽은 아내 생각이 났지만 얼마동안은 참 편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애들은 아무 말도 없는데 말이다.
어느 날인가는 드디어 큰 아이가 입을 열었다. “큰아들만 아들이냐?”고. 그날로 말없이 짐을 꾸렸다. 그런데 사정은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둘째, 셋째, 넷째…. 허탈한 심정으로 예전에 살던 시골집에 왔을 때 문득 40년 전에 헤어진 그 아이가 생각이 났다.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소록도에 내다버린 아이. 소록도를 찾아 드디어 아들을 만난다. 그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다. 쉰이 넘은 데다 그동안 겪은 병고로 인해 아버지보다 더 늙어 보이는 아들. 눈빛만은 예전과 다름없이 투명하고 맑은 그 아들이 울면서 아버지를 반겼다.
아들은 단숨에 달려와 아버지를 껴안으며 말했다. “아버지를 한시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40년이나 기도해 왔는데 이제서야 기도가 응답되었군요.” 미안했다. 애비로서 면목이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여유도 없이 물었다. “어째서 이 못난 애비를 그렇게 기다렸는가.”를. 아들은 입을 열었다. “여기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았노라.”고. 아버지는 깨달았다. “나의 힘으로 온 정성을 쏟아 가꾼 아홉 개의 화초보다, 쓸모없다고 내다버린 하나의 나무가 더 싱싱하고 푸르게 자라 있었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