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늘은 제발 보리밥 싸지 마세요.”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열면 널브러져 나를 바라보는 보리밥이 너무 미웠다. 거기다가 단골 반찬은 무말랭이와 콩장이었다. 내 짝꿍 근웅이는 약국집 아들이라 그런지 항상 밥 위에는 노오란 계란이 덮여 있었다. 그게 왜 그리 부러웠던지? 바야흐로 풍요의 시대가 열렸다. 이상하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맛있던 음식이 이제는 옛 맛이 느껴지질 않는다. 김도 어릴 때 먹던 맛이 아니고, 계란 맛도 예전 같지 않다.
음식뿐이 아니다. 눈과 귀도 고급화 되어가는 것 같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T.V.는 고사하고 변변한 라디오도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이던가? 이장 댁에서 방송기계를 구비해 놓고 집집마다 연결 해 스피커를 설치하였다. 하루 종일 KBS만 흘러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 자그마한 스피커에 우리는 울고 웃었다.
아침이면 들려오는 “미국의 소리”는 잡음이 하도 심해서 들렸다 안 들렸다 했지만 장기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낭랑하기만 했다. 우리 아이들의 최고 인기 프로는 “국군의 방송”이었다. 특히 총소리가 많이 나오는 드라마는 우리의 가슴을 들뜨게 하였다. 지게 작대기나 막대기를 들고 아랫입술을 털며 내던 기관총 소리. 이산 저산을 뒹굴며 우리는 총싸움을 했다. 그럴듯한 포즈를 잡으며 마치 용감한 국군 용사라도 된 것처럼 편을 갈라 드라마 흉내를 냈다. 얼마 후 트랜지스터가 나오면서 듣는 방송이 다양화 되었다.
드디어 텔레비전 시대가 도래했다. T.V.는 또 다른 세계였다. 그 당시 텔레비전을 가진 가구는 특수층이었다.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야, 텔레비전 보여줄까?” 이 한마디에 그에게서는 엄청난 카리스마(?)가 풍겼다.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시청하던 드라마. 흑백 T.V.에 지금 생각하면 허술한 세트였지만 그때 드라마는 몸의 전율이 일정도로 재미가 있었다. 1970년 TBC를 통해 방영된 “아씨”. 72년 KBS의 “여로”는 아직도 우리세대 가슴에 남아있다.
텔레비전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프로 레슬러 “김일”이다. 어쩌다 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리면 지금 월드컵 축구 경기가 열리듯 온 동네가 술렁거렸다. 그때에는 군청에서 커다란 T.V.를 건물 창으로 보게 하여 군청 마당 응원이 펼쳐졌다. 어린 눈으로 본 김일 선수는 멋이 있었다. 타국 선수들이나 다른 한국 선수들은 인상이 가벼워 보이지만 김일은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에 믿음직스러웠다.
호랑이와 담뱃대가 그려진 비단 가운을 입고 링에 오르는 김일. 가운을 벗어젖히면 근육질의 몸이 드러난다. 레슬링 경기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김일은 금방 상대 선수를 쓰러뜨리지 않는다.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당하고, 어떤 경우에는 무참하게 맞기만 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그의 이마가 상대방의 이마에 작렬한다. 김일의 주무기인 박치기가 작동하는 찰나이다. 김일이 박치기를 하면 안 쓰러지는 선수가 없었다.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김일은 우리의 자존심이었고, 민족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치유자였다. 정말 김일은 한국이 낳은 황금이마였다. 그가 박치기로 거구의 서양레슬러들을 쓰러 뜨릴때에 우리도 함께 응원하며 김일의 박치기 흉내를 냈다. 아무것이나 들이받으면서 친구들은 점점 머리가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미국 한복판에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풍요 속에 파묻혀 소중한 것들을 다 망각 해 버린 것 같다. 행복 지수는 점점 낮아져만 간다.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지만 추억을 가슴에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 부자이다. 눈을 감고 생각하면 그때는 모든 것이 소중했다. 이 더운 여름, 잠시 생각의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가자. 그리고 어린 날 마냥 행복 해 했던 그 순간에 머물며 지친 삶을 잠시 추스려 보자. 소박하지만 순수하고 행복했던 날들을 기억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