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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5 07:40

세월이 가면 10/31/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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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졸업이 가까워지며 “사은회”가 열렸다. 짧게는 1년 동안 길게는 6년을 한결 같이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들을 모셔 놓고 다채로운 행사로 감사를 표하는 자리였다. 따라서 “사은회비”가 졸업경비에 포함이 되어 있었고 소박하지만 정감어린 음식이 준비되었다. 가난한 시절 우리로서는 교장선생님의 끝이 없는 훈화나 다른 순서들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음식이 들어오며 아이들의 표정이 살아나고 각반을 대표하는 재능꾼들이 선생님들 앞에서 온갖‘끼’를 부리며 사은회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이른다.

갑자기 “재헌”이가 무대에 등장한다. 작지만 당찬 아이였다. 성격이 예민해서 평상시 가까이 다가가기가 걸끄러운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우리 반을 대표해서 무대에 선다는 것이 의아했다. 그래도 응원의 박수를 손이 으스러져라 쳐댔다. 재헌이가 갑자기 TV에 나오는 가수의 포즈를 잡더니 “♬소리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같은 이슬비 누가 울어 이 한밤 잊었던 추억인가♪” 온몸을 비비 꼬면서 능숙한 발성으로 부른 노래는 당시 최고인기 가수 “배호”의 “누가 울어”였다. 그 엄숙한 사은회에서 대중가요를 천연덕스럽게 불러 제끼는 재헌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 여유와 가창력에 놀라고 놀랐다. ‘저애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다니!’

참, 멋져보였다. 재헌이는 이후 졸업식장에서까지 아이들의 시선을 끄는 일약 스타가 된다. 역시 60년대요, 시골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지금도 가끔 그 장면이 떠오르면 미소를 머금다가 “누가 울어”를 흥얼거린다. 목을 잔뜩 누른 배호 창법으로 말이다. 재헌이는 중학교에 올라가 한반이 되었고 꽤나 친한 친구가 되었다.그러다가 재헌은 양평종고로 나는 서울로 고등학교를 진학하며 그와의 인연은 멀어졌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30대에 접어들며 나는 목사안수를 받았고 열정을 불사르며 서울에서 목회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름, 교회 목양실에 어느 낯선 남자가 ‘노크’를 하며 들어섰다. 반바지에 새카맣게 얼굴이 타버린 그를 나는 알아보지 못했다. “재철아!” “응?” 목사의 이름을 너무 친근하게 부르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정필”이었다. 재헌보다 훨씬 더 친하디 친한 죽마고우였다. 사연을 물으니 “내가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고 싶어 하던 차에 양수리 수상스키장에서 휴가를 즐기다가 교회이름만 안상태로 물어물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정필이 덕분에 양평을 다시 찾게 되었고 제일 궁금하던 “재헌”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거의 20년만이었다. 녀석은 유행가 가사처럼 한량처럼 살고 있었다.한 여성과 동거를 하며 자그마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친구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그의 모습은 초라하고 어두워 보였다. 인사를 해 오는 동거녀의 인상은 그냥 그랬다. 30대 중반에 마주친 녀석의 모습은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당당하게 좌중을 압도하던 그가 아니었다. 나는 그때 “추억의 인물은 안 만나는 것이 좋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미국에 오며 친구들과의 연락은 모두 두절되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미국으로 온 후에 한국 전화 국번이 재편성되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친구들의 연락처는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주권을 받아 오랜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목사이기에 집회를 인도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런 와중에도 양평이 그리웠다. 겨우겨우 시간을 내어 직접 차를 몰고 양평으로 향했다. 하지만 양평은 내가 어린 시절에 꿈을 키우던 그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양평까지 전철이 운행되는 것부터 가는 곳마다 음식점과 유흥시설 뿐 내가 거닐던 추억의 장소는 이미 힘 있는 사람들의 벌이터로 변해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던 “이정필”은 몇 년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재헌”이도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갑자기 시조가 머리를 스쳐갔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도라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人傑)은 간 듸 업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그렇게 세월은 또 흐르고 있다. 다시 한번 “사은회”장에서 “재헌”의 “누가 울어”를 듣고 싶은 가을밤이다. 어즈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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